씻김굿 보컬 흉내낼사람 ‘아무도 없소’
캐리커처 최남진 기자 namjin@donga.com
그의 최대 성공작인 ‘누구 없소?’와 ‘코뿔소’를 담은 1988년 2집의 황홀한 블루스와 록의 행간을 기억하고 있는 사람이라면, 나아가 그의 음악적 이력을 집대성한 1993년의 2장짜리 라이브 앨범 ‘아우성(我友聲)’(아마도 여성 보컬리스트의 것으로는 최고봉인)에서 유감없이 발휘된 다이내미즘을 만끽한 기억을 보존하고 있는 사람이라면, 그리고 비범한 탈속의 호흡으로 ‘목포의 눈물’과 ‘선창’ 같은 옛 노래들을 독창적으로 리메이크했던 ‘Behind Time’(2003)을 소중하게 듣고 또 들은 사람이라면 몇 장 되지 않는 조촐한 디스코그래피만을 가진 이 음악의 여사제가 우리 대중음악을 얼마나 풍요롭게 만들었는지 다시 한 번 상기하게 될 것이다.
한영애의 진가는 이정선과 이주호, 그리고 김영미와 함께한 4인조 혼성 포크 그룹 해바라기의 일원으로 모습을 드러냈던 1977년에 이미 증명되었다. 청년문화의 강제적 말살 직후 매너리즘으로 회귀하던 1970년대 후반의 암울함 속에서 그는 전무후무한 혼성 보컬 하모니의 일익이었을 뿐만 아니라 ‘마음 깊은 곳에 그대로를’이나 ‘꽃신 속의 바다’ 같은 솔로 곡을 통해 양희은과 대척에 설 수 있는 유일한 존재로서의 가능성을 주지시켰다. 그러나 이 4인조의 역사적인 명반들은 시장에서 무시당했고 같은 시기에 발표한, 준비되지 않은 두 장의 솔로 앨범은 솔직하게 말해 없느니만 못했다. 한영애는 연극으로 방향을 전환하여 극단 자유극장의 배우로 1983년까지 또 다른 무대 인생을 산다.
이정선의 텍스트인 ‘건널 수 없는 강’과 ‘여울목’을 단숨에 명작의 지위로 올려놓은 1986년 벽두의 첫 솔로 앨범과 ‘누구 없소?’에서 ‘바라본다’까지 숨 막히는 긴장감이 팽팽하게 아로새겨져 있는 1988년의 두 번째 앨범에 이어 ‘조율’과 ‘말도 안돼’를 담은 1992년의 3집에 이르도록 그는 완전연소의 비등점에서 불타오를 때까지 침묵에게 소리를 양보하는 집요한 견인주의의 작은 성채를 쌓는다.
그가 이 맹장들의 공동체에서 함양할 수 있었던 중요한 미덕은 앨범에 대한 완전주의와 라이브에 대한 확고한 신념이었다. 그는 그의 앞에 놓인 혁혁한 선배와 동료들과 더불어 풍족한 삶과 격렬한 환호 대신 평생 음악만을 사랑하고 또한 그것으로부터 고통받는 생활을 선택했다. 1995년 네 번째 앨범은 일관되게 견지해온 그와 같은 뮤지션십의 작은 선물이다.
강헌 대중음악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