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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있게한 그 사람]천진기 국립민속박물관장

입력 | 2011-11-11 03:00:00

민속학 눈뜨게 해주신 ‘갑자생 아버님’




일러스트레이션 김수진 기자 soojin@donga.com

필자가 20년 넘게 근무해 온 국립중앙박물관 국립문화재연구소 국립민속박물관은 공교롭게도 모두 경복궁 안에 위치했거나 하고 있다. 그 덕택에 ‘매일 경복궁에 입궐했고 퇴궐한다.’ 이런 발걸음이 현재의 나를 있게 했다면 그 길 속에서 나와 인연을 맺은 사람은 과연 몇 명일까. 가족, 친척, 학교, 직장, 사회에서 만난 사람들, 그 이름 하나하나를 쓰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 수는 100명을 채 넘지 못했다. 휴대전화의 연락처를 보았다. 699명이다. 사회활동을 활발히 한다는 일반사람의 인연도 1000명을 넘기가 힘들다고 한다.

내 연락처 어디에도 없지만 언제나 찾아가 만날 수 있는 사람들이 있다. 이제 내 마음에 새겨진 아버지, 그리고 민속 현장에서 만났던 어른들이 나의 영원한 스승이고 인생의 진정한 울타리이다.

천진기 국립민속박물관장

선친께서는 ‘물어 보나마나 갑자생(甲子生·살아계셨으면 올해 88세임)’이라는 갑자생이셨다. 근현대사에서 가장 고생하신 세대가 바로 갑자생이라 한다. 그래서 ‘물어 보나마나 갑자생’이라는 말이 생겨났다고 한다. 이렇게 이름 붙은 갑자생으로 살면서 평생 전쟁을 몇 번 겪으셨다. 태평양전쟁 때는 직접 일본에 징병을 갔다 구사일생으로 돌아오셨고 6·25전쟁 동안은 그 한가운데 계셨다. 선친은 셋째 아들로 태어나 보통학교에서 한글과 한자만 깨치고 척박한 고향땅에서 평생 농사를 지으셨다. 선친은 ‘임당(林堂)’이라는 택호(宅號)와 함께 ‘풍구대’라는 별칭도 가지고 계셨다. ‘풍구’는 타작을 하고 난 뒤 알곡에 섞인 쭉정이, 겨, 먼지 따위를 날려 보내기 위해 바람을 일으키는 농기구인데 평소에 말씀을 시원스럽게 하셨고 마을에 얽힌 일이 있으면 언제나 나서서 풍구처럼 시원하게 시시비비를 잘 가려 해결하셨기 때문에 가지게 되신 별칭이다. 그런 선친께서 “민속학과는 전국에서 안동대에 하나밖에 없으니 여기서 일등하면 전국에서 일등하는 것이다”라고 권유하셨다. 선친께서 ‘블루오션 학문’을 추천하신 것이다. 지금까지도 내 인생 최고의 선택이 아니었나 생각한다.

민속학은 현장의 학문이다. 현지 마을에서 어른들의 경험과 기억을 그들의 입과 눈을 빌려 질문해 답변을 듣고 자료를 얻는다. 많은 옛날이야기는 ‘옛날 옛적 아주 먼 까마득한 옛날에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에’로 시작한다. 그런데 담배는 임진왜란 이후 우리나라에 전래되었다. 오랜 우리 역사를 놓고 볼 때 임진왜란은 결코 아주 먼 옛날이 아니라 비교적 가까운 옛날이다. 전승 현장을 경험하고 생활해 오신 어른들은 민속학 강의실 안의 어떤 선생님보다 실제적인 스승이다.

천안 광덕리에서 밤새도록 호두를 까주시고, 며느리가 해온, 한 번도 덥지 않은 새 이불을 내어 주시며 장승은 언제 만들었고, 어떻게 왜 모시는지를 얘기해 주시던 할아버지 할머니. 된장찌개에 밥 한 그릇 선뜻 내어주시며 밥 먹는 상 옆에서 옛날 시집살이 얘기 해주시던 할머니, 정초 마을제사 때 한밤중 우물가에서 찬물로 목욕재계하면서 춥다는 말 한마디 않으시고 오히려 서낭신이 도우셔서 뜨끈뜨끈하다고 하셨던 어른신들. 30년 이상 민속현장에서 만났던 나의 선생님은 소리 한 자락 멋지게 뽑아 재끼는 할아버지였고, 바느질과 음식 솜씨 좋은 할머니셨다.

아프리카의 현자라고 불린 민속학자이자 소설가인 ‘아마두 함파테 바’가 1962년 유네스코 연설에서 남긴 “아프리카에서 한 노인이 숨을 거두는 것은 도서관 하나가 불타는 것과 같다”는 유명한 말을 되새겨 보지 않더라도 나의 스승이자 제보자였던 현장 어른들의 옛날이야기 보따리는 한 서가를 채우고도 남을 만한 내용이다.

고향이 안동이라는 사실이 나의 ‘영원한 빽’이고 민속학을 공부한 것이 평생 나의 ‘든든한 간판’이다. 이러한 ‘빽’과 간판을 얻게 해주신 분이 아버지다. 그렇게 들어선 불루오션 학문인 민속학 배움의 길에서 명강의를 들려주신 스승은 현장에서 만난 어른들이다.

천진기 국립민속박물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