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황스럽습니다만, 알츠하이머형 치매가 시작됐다는 소견입니다.”
“…설마요, 저는 이제 서른인데요 선생님.”
- ‘천일의 약속’》
‘천일의 약속’은 십여 년간 김수현 드라마의 변방에 머물던 내가 그나마 재방송과 다시보기의 힘을 빌려 띄엄띄엄 보기 시작한 그의 첫 드라마다. 목청 좋은 배우들이 따발총 쏘듯 쏘아대는, 반쯤은 독설 같은 대사도 그렇고, 플롯의 짜임새보다는 상황과 대사의 힘에 기대 흘러가는 줄거리도 그렇고, 여전히 적응은 힘들다.
그런데도 왜 보느냐고 묻는다면 순전히 주인공 서연(수애)이 알츠하이머형 치매에 걸렸기 때문이라고 답하겠다.
드라마가 초반을 지난 지금도 나는 지형(김래원)과 서연의 사랑이 안타깝다거나 서연의 사촌오빠 재민(이상우)이 멋있다거나, 서연과 남동생 문권이 안쓰럽다거나 하는 이유로 이 드라마를 보지는 않는다.
‘천일의 약속’은 상실에 관한 드라마다. 서연은 평범한 어린시절과 작가가 되겠다는 꿈, 그리고 갖고 싶던 남자를 잃었다. 지형은 단 한 명의 사랑하는 여자를 잃었다. 지형의 약혼녀 향기는 평생 사랑해온 남편감을 잃었고, 문권은 엄마 대신이었던 누나를 놓치고 있다. 심지어는 갖출 것 다 갖추고 유복하기 이를 데 없어 보이는 지형과 향기의 부모마저도 공허해 보인다. 성형수술에 집착하는 향기의 엄마 현아(이미숙), 룸살롱에서 노래를 부르며 흔들거리는 지형의 아버지 창주(임채무)와 향기의 아버지 홍길(박영규)….
‘천일의 약속’은 기억상실증이 만능열쇠처럼 별안간 등장해 극을 열고 닫는 대다수 드라마와는 다르다. 기억을 잃어가는 서연의 모습은 상실이란 ‘천일의 약속’ 특유의 정서와 섬세하게 결합해 비극을 더욱 공고하게 구축한다.
이렇게 구축된 비극의 기운은 다소 손발이 오그라드는 서연의 독백이나 말없이 흘러가는 정적까지 감싸 안는다. 제대로 이룬 것도 없이 세상에 많은 것을 빼앗겨온 서연이 서른이 된 뒤 단 하나 남은 자기 자신마저 잃어버렸다. 이런 비극에, 졸업하고 희망차게 사회에 나왔다 여러 차례 흠씬 두들겨 맞고 녹진하게 지쳐버린 나 자신을 포함한 주변 친구들이 공명하는 것 같다. 내가 뭘 하고 있는지, 혹은 내가 뭐가 되어가고 있는 건지 나도 잘 모르겠는데 이제 서른이 되어버린, 혹은 되어가고 있는 거다.
P.S. 그래도 드라마는 드라마다. 가진 것 없는 서연에게도 잘난 애인 지형이 있다는 점은 별개의 이야기다. 그마저 없는 사람들이 있다는 또 다른 비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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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세미 동아일보 기자. 이런 자기소개서는 왠지 민망해서 두드러기 돋는 1인. 취향의 정글 속에서 원초적 즐거움에 기준을 둔 동물적 삶을 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