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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칼럼/김무곤]종이책 읽기의 즐거움

입력 | 2011-11-12 03:00:00


김무곤 동국대 언론정보대학원장

종이책이 곧 없어지고 전자책이 그 자리를 차지할 거라는 소문이 돌고 있는 모양이다. 거리에서 지하철에서 스마트폰만 뚫어져라 들여다보고 있는 사람들을 보노라면 섬뜩해 질 때가 있다. 얼마나 많은 예언이 이내 현실이 되었던가. MP3가 LP를 몰아내고 디지털카메라가 필름카메라가 있던 아랫목에 앉아버린 지 오래다. 전자책은 편리하다. 우선 많은 책을 하나의 단말기에 담을 수 있고 서점에 사러 가거나 인터넷으로 주문하고 나서 기다리는 수고와 기다림의 시간을 생략할 수 있다. 그뿐 아니라 사람과 사람, 책과 사람을 연결하는 ‘지식 네트워크 기능’을 쉽게 실현할 수 있는 것도 장점이다. 그렇다면 종이책 수천 년의 역사가 전자책 단말기와 태블릿PC, 스마트폰에 의해 곧 막을 내릴 것인가. 나의 대답은 ‘아니요’뿐 아니라 ‘아니 되오’다. 종이책을 읽는 일은 e북을 읽거나 인터넷을 하거나 스마트폰을 켜는 일과는 전혀 다른 ‘대체 불가능한’ 즐거움과 가치를 사람에게 안겨주기 때문이다.

지금은 종이책이 마치 사라져야 할 올드미디어(old media)의 대표처럼 여겨지고 있지만 아직 어떤 뉴미디어(new media)도 책이 가진 장점을 갖추지 못하고 있다. e북과 태블릿PC가 종이책의 특성을 닮기 위해 노력하고 있지만 아직 어림도 없다. 전자책은 무엇보다 종이책을 읽을 때 느끼는 촉각의 쾌감을 흉내 낼 수 없다. 양손으로 종이책을 들고 손가락을 자유자재로 움직일 때 느끼는 손맛은 짜릿하다 못해 황홀하다.

책장 넘기는 소리-종이냄새 ‘황홀’

그뿐인가. 종이책을 읽으면 책장이 스르륵 넘어갈 때 들리는 소리를 들을 수 있고 향긋한 종이 냄새까지 맡을 수 있다. 이토록 다양하게 인간의 감각을 만족시키는 매체가 또 있던가. 더구나 종이책은 기차, 공원 벤치, 침실, 산, 바다 어디든 가지고 갈 수 있고 어디서든 펼칠 수 있다. 충전시키지 않아도 되고 콘센트에 꽂지 않아도 되는 ‘무한 에너지’이기 때문이다.

전자책 전도사들은 전자책의 가장 큰 효용으로 사람과 사람, 책과 사람을 연결하는 사회적 네트워크를 넓힐 수 있다는 점을 크게 외친다. 그러나 책 읽는 일마저 하나의 네트워크로 엮으려는 시도는 미래를 위한 비전이 아닌, 중세(中世)로의 회귀를 꿈꾸는 기획으로 보인다. 나는 내가 어떤 책을 사는지, 어떤 책을 읽는지, 어느 구절에 밑줄을 치는지 다른 사람들이 알기를 원하지 않는다. 나에게 독서는 ‘유쾌한 고립행위’이기 때문이다. 마르틴 루터와 그의 친구들이 시도한 이래 ‘은밀한 독서’, 즉 혼자 조용히 남모르게 읽는 묵독이 대세가 됐다. 중세 이전의 ‘바람직한’ 독서 행위는 소리 내어 읽기였다. 가족이나 교회, 국가와 같은 공동체가 개인의 생각을 통제해야만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윽고 ‘은밀한 독서’는 사회에 얽매이지 않는 개인의 자유로운 생각을 키워 중세의 어둠을 뚫고 근대를 여는 기폭제가 됐다. 슈테판 볼만은 그의 아름다운 종이책 ‘책 읽는 여자는 위험하다’에서 말한다. “조용히 혼자 읽는 행위를 통해 책 읽는 여자는 어떤 사람도 들어올 수 없는 자신만의 자유공간을 획득했을 뿐 아니라 그것을 통해 독립적인 자존심 또한 얻게 되었다.”

전자책의 효용을 외치는 사람들은 사람이 책에서 얻고자 하는 것이 오직 정보와 지식뿐이라고 생각하는 듯하다. 그러나 그건 속물적인 오해다. 독일 평론가 발터 베냐민은 어린 시절 느꼈던 책 읽기의 황홀을 다음과 같이 적었다. “책은 읽는 것이 아니다. 행간에 머무르고 거주하는 것이다.” 그렇다. 우리는 오직 글자의 의미를 해석하기 위해 책을 집어 드는 것이 아니다. 즐거움과 행복은 책 읽기의 가장 큰 목적이다. 정보통신 기술의 신봉자들은 전자책이 가진 정보 전달의 편리성과 신속성을 강조한다. 그러나 오히려 느리게 살고 싶어서 책을 읽는 사람도 있다는 걸 왜 모르는 걸까.

책읽기는 어쩌면 연애다. 연애가 그렇듯 책과의 만남 또한 종종 이성적 요구가 아닌 순정한 욕망에서 비롯된다. 연애가 어디 상대방의 지식이나 사상에 대한 매혹에서 시작되던가. 책도 연애도 가장 먼저 다가오는 것은 모양과 무게, 색깔과 감촉이다. 상대방의 말에 귀 기울이는 건 다음 순서다. 몰입하면 기차여행도 침대에도 함께 가고 싶어지는 것도 똑같다. 그 또는 그녀와 마찬가지로 종이책 또한 자신을 읽는 사람을 들여다보고, 두드려보고, 만져본다. 그리고 때로 뒤흔들거나 도닥이거나 배반한다. 책에 담긴 정보가 중요하지 장정이나 디자인은 대수롭지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참으로 대단한 사람이다. 그건 상대방을 만나보지 않고 e메일이나 메신저만으로 결혼을 결정하는 것과 마찬가지 아닌가.

어떤 e북-태블릿PC도 흉내못내

나는 오늘도 종이책을 읽는다. 천천히 책장을 넘기면서 손가락에 전해지는 감촉을 온몸으로 느낀다. 때때로 글과 글 사이 행간과 여백을 지그시 바라본다. 나는 언제나 종이책과 함께 있다. 숲에서, 산에서, 바다에서, 하늘 위에서, 기차에서, 찻집에서, 잔디밭에서, 사랑하는 사람의 무릎 위에서. 나는 읽는다. 나는 살아 있다.

김무곤 동국대 언론정보대학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