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곳은 소, 와인, 바다가 모두 빨갛다/기 도이처 지음·윤영삼 옮김/372쪽·1만6000원·21세기북스
언어학자 기 도이처. 그에 따르면 색깔을 표현할 때 쓰는 말이 다르면 눈에 보이는 색깔도 다르다. 모국어 고유의 특정 표현 방식을 반복적으로 사용함으로써 습관이 생기고 이 습관은 우리의 사고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사진 출처 가디언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에 나오는 이 구절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학자들의 이론은 분분하다. 해가 뜨거나 질 때의 바다를 묘사한 것이라거나 적조현상으로 바다가 정말 붉게 보이는 때가 있다거나, 심지어 당시 와인이 파란색이었을 것이라는 얘기까지 나왔다. 호메로스는 바다 말고 소까지도 와인처럼 보인다고 묘사했다. 이쯤 되니 호메로스가 색맹이었다는 설도 나온다.
19세기에 영국의 총리를 지낸 윌리엄 글래드스턴은 이에 의문을 품고 호메로스의 시를 샅샅이 뒤졌지만 결국 바다를 묘사할 파란색을 가리키는 단어를 찾지 못했다. 글래드스턴은 “고대 그리스인들은 우리와 달리 세상을 흑백으로 인식했고 색깔 체계에 대한 인식은 일부만 개발된 상태였다”며 “호메로스가 쓴 ‘와인’이라는 단어는 특정 색깔을 가리킨 게 아니라 짙음의 정도를 묘사한 것”이라고 결론지었다.
‘언어로 보는 문화’라는 부제에서 보듯 이 책은 언어가 인간의 사고방식에 영향을 미친다는 메시지를 담았다. 모국어가 무엇이냐에 따라 사람들의 사고방식도 달라진다는 것. 저자는 언어학자 놈 촘스키가 “화성인의 눈으로 지구인의 언어를 관찰해보면 모두 똑같아 보일 것”이라고 한 말에 도전한다. 여러 언어학자가 “언어는 인간의 본능이기 때문에 모든 인류의 언어는 똑같다”고 말하는 것과 정반대다.
‘언어는 세상을 보는 렌즈’라는 간단명료한 주장을 도출하기 위해 저자는 19세기 이래 진행된 다양한 연구사례를 복잡한 추리소설 퍼즐을 맞추듯 하나하나 검토한다. 특히 색깔 어휘를 다룬 많은 연구를 갈무리한 점이 눈길을 끈다.
책에 따르면 독일에서 정교한 철학이 발달하고 독일 사람들이 질서를 잘 지키는 것은 까다로운 독일어 문법에서 비롯됐고, 미래시제가 없는 언어를 쓰는 사람들은 미래에 대한 개념도 부족하다. 19세기 미국의 철학자 랠프 월도 에머슨이 “우리는 언어에서 그 나라의 영혼을 거의 모두 추론해낼 수 있다”고 한 말에 일리가 있는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