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1> 토끼의 뿔과 거북의 털을 구하러 다녔소
1996년 김영삼 대통령이 송월주 조계종 총무원장(오른쪽) 등 불교 종단 지도자를 초청한 오찬 모임에 들어서고 있다. 그는 개신교 장로였지만 불교계와 원만한 관계를 유지했다. 동아일보DB
“관 주도로 경제성장할 때는 규모가 작아 모든 걸 파악하기 쉬웠지만 국제화된 지금은 손바닥 뒤집듯 쉽게 경제 상황을 예측할 수 있는 때가 아닙니다. …정책적 결정과 판단을 이유로 담당자를 구속해서는 안 됩니다.”(YS)
“잘 수습 바랍니다.”(송월주 총무원장)
YS는 “얼른 (모든 것을) 인계하고 청와대를 나서고 싶다”는 말까지 했다. 차분하지만 체념한 듯한 목소리였다. 외환위기의 실상을 축소 보고해 환란을 초래한 혐의(직무유기)로 1998년 구속 기소됐던 두 경제 관료는 YS의 말처럼 2004년 무죄가 확정됐다.
YS는 인간미가 넘쳤다. 말수가 많지 않았지만 사람을 편하게 해주는 스타일이었다. 여론에 민감했고 문제가 생기면 빨리 사과했다.
1995년 12월 국방부 예배 사건이 터졌다. YS가 용산 국방부 내 중앙교회 예배에 참석하자 경호팀이 인접한 원광사 불자들에 대해 경호를 이유로 출입을 통제했다. 한 달쯤 지났을까, 다시 같은 장소에서 YS가 김광일 대통령비서실장, 이양호 국방부 장관, 권영해 안기부장 등 공직자들과 예배를 봤다. 총무원으로 항의 전화가 빗발쳤다. 예배에 개신교 장병을 참여시키려고 당일 일직과 당직을 불자나 가톨릭 신자로 바꿨다는 것이다. 경호팀이 법회가 끝난 불교 신도를 못나오도록 막았다는 얘기도 들렸다.
1992년 장로 대통령의 탄생을 조심스럽게 지켜보았던 불교계는 비판 여론으로 들끓었다. 며칠 뒤 이 장관이 총무원을 찾아왔다. 이 장관이 거듭 사과하기에 “지금 말씀을 문안으로 만들어 발표하라”고 말했다. 얼마 뒤 이 장관이 기자들 앞에서 그 내용을 읽으면서 사과하는 것으로 사건이 일단락됐다. 그 뒤 청와대에서 열린 모임에서 YS는 “내 종교가 소중하면 남의 종교도 소중하다”는 말을 여러 차례 언급했다.
YS와의 인연은 1988년으로 거슬러간다. 나는 10·27법난진상규명위원회 대표 자격으로 혜성 스님과 서울 인사동의 한 식당에서 통일민주당 총재이던 그를 만났다. 김동영 노무현 의원 등이 그 자리에 있었다. YS는 “10만여 명이 모인 마산 유세에서 법난 진상 규명을 촉구했다. 진상 규명을 위해 노력하겠다”고 약속했다.
종단을 책임지다 보면 정치권력과의 관계는 거부하기 어려운 유혹이다. 주변에서 당시 실력자이던 YS의 차남 김현철을 만나 보라는 권유도 있었다. 그러나 종단 현안을 위해 한 번 두 번 의지하다 보면 결국 자신뿐 아니라 모두를 해치게 된다. 그런 말이 나올 때마다 “무슨 소리냐. 필요하면 적법한 길을 통해 해결하면 된다”고 일축했다.
빨리 청와대를 떠나고 싶다던 YS를 다시 만난 것은 2000년 무렵 그의 서화전에서였다. 그는 퇴임 뒤 의기소침해 두문불출하다 막 산에 다니기 시작했다. 유명한 ‘대도무문(大道無門)’이 눈에 들어왔다. 그의 휘호로 널리 알려졌지만 그 말은 송나라 선승 혜개 스님이 수행의 이치를 담은 화두를 모은 책 ‘무문관’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 뒤에 나오는 말도 살펴볼 필요가 있다.
‘대도무문 천차유로(大道無門 千差有路·대도에는 문이 없으나 갈래길이 천이로다) 투득차관 건곤독보(透得此關 乾坤獨步·이 빗장을 뚫고 나가면 하늘과 땅에 홀로 걸으리).’
정리=김갑식 기자 dunanworld@donga.com
⑩회에서 송월주 스님은 김대중 전 대통령(DJ)과의 인연을 회고합니다. 1997년 대통령선거 2, 3일 전 만난 스님의 말에 DJ의 안색이 굳어졌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