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력한 서풍을 받아 파도가 거세게 밀려드는 서면 구암마을 부근 해변에서 스토브에 물을 끓여 핸드드립 커피를 준비하는 중. 울릉도의 해변은 모래 대신 둥글둥글한 몽돌이 펼쳐져 있어 파도가 들이칠 때마다 돌이 밀리며 맷돌 가는 소리가 났다.
15. 울릉도
■ 울릉도 저동항서 맛 본 오징어내장탕
자전거 안 가져온
허화백 트레킹 변신
강풍에 비바람 거세
악! 멤버 발목골절
공군 케이블카 후송
“흠…. 갈바람…. 내일부터 섬이 텅 비겠구마.”
그러고 보니 창문 앞의 수풀이 바람에 스산하게 흔들리고 여느 때 같으면 밤바다 수평선에 집어등으로 불빛의 띠를 이루고 있어야할 오징어배들도 자취가 없다. 울릉도 도착 첫날부터 일행을 축축하고 하릴없게 만든 가을비는 그칠 줄 모르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폭풍이 몰려오고 있었던 것이다. 바람에 민감할 수밖에 없는 이곳 사람들은 바람을 세기와 방향, 그리고 계절에 따라 구별해 달리 부르는데 ‘갈바람’은 가을에 부는 강한 서풍을 뜻한다.
“갈바람이 한번 오면 몬가도 이틀은 쎄리 분다고 봐야지예. 여객선은 몬 뜰테고…. 내일 사람들이 육지로 다 빠져나갈 낍니더. 그라모 해안 일주도로가 한산해질 끼고, 자전거 타기에는 딱 아이겠능교?”
밤이 이슥해질수록 바람은 사나워져만 가는데, 바깥 날씨가 궂으니 집안이 더욱 아늑하고 포근하게 느껴진다. 허영만 화백과 우리들은 최대장의 어머니가 지난 봄 담근 꽁치젓갈, 명이나물, 그리고 이런저런 살아가는 얘기를 안주삼아 최대한 느린 속도로 술잔을 기울였다. 섬의 밤은 길었고 비바람은 밤새 으르렁댔다.
● 허 화백, ‘집단가출’서 ‘침낭과막걸리’팀으로 변심(?)
“울릉도는 걷기에 아름다운 섬이다. 이번만은 자전거보다 야영하며 트레킹을 하자.”
자전거 대신 트레킹을 선택한 허영만 대장
사실 울릉도는 혹독하게 가파른 고갯길들이 도사리고 있고 섬목에서 저동 사이의 해안도로가 끊겨있어 석포에서 저동 내수전까지는 부득이 험한 산길을 달려야하므로 자전거로는 만만치 않은 곳이다. 하지만 일생일대의 자전거 전국일주가 목표인 나머지 멤버들은 지금까지 1년 넘게 달려온 길이 아까워서라도 울릉도 자전거 일주를 포기할 수는 없었다. 허화백의 제안에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인 뒤 막상 울릉도로 떠나는 강릉 안목항에 다들 자전거를 끌고 나타나자 트레킹 준비만 해온 허화백이 느꼈을 배신감은 짐작할 수 있을 터. 어쨌든 허화백이 이끄는 트레킹팀은 길을 떠났고, 대장을 잃고 별개로 움직이게 된 자전거팀은 궂은 날씨에 발이 묶여 도동과 저동 동네길에서 자전거로 워밍업을 하며 따분한 하루를 보냈다.
그날 밤은 유난히 바람이 강하고 빗줄기가 거세 산으로 떠난 허화백 일행들의 악전고투가 예상됐는데 자정이 가까운 시간에 기어코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날씨가 나빠 성인봉까지 진출하지 못하고 텐트를 날려버릴 듯한 강풍을 무릅쓰고 말잔등에서 야영 중 멤버 한명이 미끄러져 발목 골절상을 입은 것이다. 비바람이 휘몰아치는 야간에 골절상 환자를 들것으로 후송하는 난감한 상황에서 최희찬 구조대장이 급히 이곳저곳에 전화를 돌려 공군의 케이블카를 사용할 수 있었던 것은 불행 중 다행이었다. (이 지면을 빌어 부상한 민간인을 위해 심야에 케이블카를 가동하는 어려운 결정을 내려준 울릉도 주둔 공군에 깊은 감사를 드린다)
● 갈바람 맞서 울릉도 일주, 집채만한 파도의 스펙타클
갈바람은 서풍인지라 도동에서 사동을 넘어 서면 태하리까지 서쪽을 향하는 것이 고난의 행군이다. 정면에서 불어오는 바람 탓에 평지임에도 불구하고 마치 가파른 언덕을 오를 때처럼 자전거의 기어비를 최대한 낮춰야 넘어지지 않고 겨우 겨우 전진할 수 있었다.
울릉도에서 난코스인 현포령을 힘겹게 넘자 현포처럼 펼쳐져 궁극의 청량감을 안겨줬다. 현포항 뒤로 노인봉(왼쪽)과 송곳봉이 뾰족하게 솟아있는 풍광이 무척이나 이국적이다.
비 그친 동해 화산섬
내딛는 곳마다 절경
울릉옛길 넘어 만난
시원한 오징어내장탕
노고함 사르르 풀려
하지만 바람은 고난만을 안겨준 것은 아니었다. 강풍에 높아진 거대한 파도가 해안으로 밀려드는 스펙터클! 특히 서면사무소 앞부터 통구미까지의 서쪽 해안의 몽돌해변에서는 엄청난 힘의 파도가 밀려와 쌀 반가마니 크기의 몽돌들이 물결에 따라 이리저리 굴러다니는 소리가 대자연의 신화적 힘을 유감없이 보여준다.
파도를 구경하며 갯바위 뒤에 웅크리고 앉아 가스 스토브를 켜고 핸드드립 커피를 내려 마시는 여유와 즐거움은 울릉도 자전거 여행의 백미였다.
앞서 최대장의 말처럼 이틀 전부터 육지와의 교통이 끊겨 해안도로를 오가는 차량이 가뭄에 콩 나듯해 파도가 장관을 이룬 바닷가 길을 독차지하고 맘껏 향유할 수 있었지만 터널을 통과할 때는 모골이 송연했다.
울릉도의 대부분 터널들은 차량 2대가 동시에 교행할 수 없는 1차선. 터널 양 끝에 설치된 신호등의 지시를 어긴다면 터널 안에서 정면충돌할 수밖에 없다. 문제는 시간제로 점등되는 신호등의 주기가 자동차의 속도를 감안해 세팅되어있다는 사실이다. 게다가 터널 속은 바람통로이기도 해서 엄청난 맞바람에 불어와 속도가 나지 않자 거의 패닉 상태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수층골에서 두 개의 터널을 더 지나 태하리로 들어서자 이번엔 바람이 왼쪽에서 불어와 자칫 핸들을 잡은 손에 힘을 빼면 넘어질 판이다. 태하리에서 허영만 대장 일행들과 합류, 그날 밤은 대풍감 안쪽 태하 황토굴에서 야영을 했다. 손을 뻗으면 닿을 듯 가까운 곳에서 집채만 한 파도가 방파제에 부딪히며 내는 소리를 동굴 안에서 자장가처럼 들으며 단잠에 빠져들었다.
신선하지 않으면 맛볼 수 없다는 맛 ‘오징어내장탕’
● 52km 섬일주 피로, 울릉도 진미 오징어내장탕으로 풀다
이튿날, 아침 댓바람부터 진땀을 빼며 해발 300m에 육박하는 현포령을 돌파하자 입에서 단내가 났지만 현포전망대에서 바라보는 그림 같은 현포항의 풍경에 빠져든다. 아침을 거르고 현포령을 넘느라 에너지가 바닥난 탓인지 중간말 민가에 주렁주렁 열린 감과 무화과를 보자 군침이 돈다. 감나무 아래서 입맛을 다시며 얼쩡거리자 안에 계시던 할머니 두 분이 물끄러미 내다보더니 뜻밖에도 맘껏 따먹어도 좋다고 하신다. 너무도 감사해 뭐 해드릴게 없겠느냐고 묻자 주저주저하시더니 뒤뜰에 나무가 우거져 사람이 지날 수 없을 정도이니 톱으로 좀 잘라달라신다. 30분에 걸쳐 벌목작업을 해드리자 할머니들은 이번엔 호박조림을 한 사발 씩 내주셨다. 호박을 어슷썰기로 썰어 마늘을 넣고 물컹해질 때까지 삶은 뒤 새우젓으로 간을 한 호박조림은 속을 편안하게 하면서도 든든하게 채워줬다.
현포에서 나리, 천부리를 지나 보루산 아래 선창에서 또 다시 엄청난 고개를 만났다. 석포리로 올라붙는 이 고갯길은 울릉옛길의 들머리로 거리는 3km가 채 되지 않았으나 해발 0m부터 350m까지 올라가는, 그야말로 코가 닿을만큼 가파른 고바윗길이었는데 중간말 할머니댁에서 든든히 먹은 호박조림의 힘으로 단 한번도 쉬지 않고 주파할 수 있었다. 울릉옛길은 옛날 울릉도 사람들이 바람이 심해 배가 뜨지 못할 경우 저동과 나리동, 천부쪽의 섬목을 걸어서 다녀올 수 있도록 개척한 약 2.5km의 비포장 산길이다. 석포리에서 허화백의 트레킹팀과 합류해 울릉옛길을 함께 넘었다. 울릉옛길은 전체구간 중 초반 1.5km 정도는 자전거를 타고 갈 수 있고 나머지는 경사가 심하고 바위들이 날카롭게 드러나 있어 끌고 가야하지만 관음도와 죽도가 내려다보이는 바다 풍경을 굽어보며 감탄사를 연발하며 가다보면 어느새 끝이다.
저동에 도착한 우리를 기다리던 것은 울릉도에서만 맛볼 수 있는 오징어내장탕. 오징어의 내장을 모아 청양고추와 호박을 넣고 맑고 칼칼하게 끓인 오징어내장탕은 생태탕처럼 기름기가 전혀 없어 울릉도를 찾는 식도락가들이 홍합밥과 함께 사랑해마지 않는 메뉴다.
내장은 특성상 상하기 쉽기 때문에 오징어잡이배가 들어와 바로 작업한 뒤에 나온 신선한 것이 아니면 요리가 불가능한데 울릉도는 국내 최고의 청정해역이며 오징어 집산지이다.
총 주행거리 52.42km. 울릉도 일주의 노곤함은 오징어내장탕 한 그릇을 먹는 동안 단박에 날아갔다.
글·사진|송철웅 아웃도어 칼럼니스트 timbersmith@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