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3> 토끼의 뿔과 거북의 털을 구하러 다녔소
2003년 9월 19일 노무현 대통령이 종교계 원로를 초청한 오찬 모임이 있었다. 나와 김수환 추기경, 강원용 목사가 참석했다. 사형제도폐지운동에 적극적인 가톨릭의 요청으로 면담이 성사됐다. 나는 우리민족서로돕기운동 상임 공동대표 자격으로 방북했다 오찬 때문에 일정을 하루 단축하고 청와대로 향했다. 대통령은 사형폐지와 관련해 “검토하겠지만 법 감정도 있어 쉽지 않다”고 밝혔다. 사형폐지 문제보다는 오히려 사회 현안에 대한 의견 교환이 더 많았다.
뜻밖에 평소 과묵한 추기경이 말문을 열었다. 추기경은 “(대통령이) 동아 조선 중앙, 보수신문도 품어야 한다. 소통하기 위해 노력하기 바란다”고 말했다. 젊은 대통령은 특히 언론에 민감했다.
“권위주의는 버려야 하지만 대통령의 권위는 지켜야 합니다. 대통령이 언론을 상대로 일일이 시시비비(是是非非)를 가리는 것은 적절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송월주 스님)
“그렇지만 비판적인 여론도 있으니 참고 바랍니다.”(스님)
“원로들 말씀이시니 잘 참고하겠습니다.”(노 대통령)
노 전 대통령은 원로들에게 예의를 지키면서도 평소처럼 자신의 의사를 분명히 밝혔다. 관례를 깨고 오찬 장소였던 2층에서 내려와 현관까지 원로들을 배웅했다. 노 전 대통령은 김대중(DJ) 전 대통령처럼 말수가 많은 편이었지만 스타일은 달랐다. 강의식인 DJ의 화법과 달리 똑 부러지고 도전적이었다.
노 전 대통령과의 첫 만남은 앞에서 밝힌 1988년 서울 인사동의 한 식당에서 김영삼(YS) 통일민주당 총재를 면담할 때였다. 당시 김동영 노무현 의원 등이 배석했다. 청문회에서 이름을 알린 노 의원은 “부산 범어사에서 아버지 49재를 모셨다”며 불교와의 인연을 강조했다. 그는 불교계의 법난 진상 규명 요구에 “불교가 그렇게 탄압 받고도 왜 민주화운동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느냐”며 목소리를 높이기도 했다. YS보다 노 의원이 자주 말했던 기억이 난다.
2009년 5월 23일 노 전 대통령이 스스로 몸을 던져 목숨을 끊었다는 비보를 접했다. 사흘 뒤 열린 대통령 자문 국민원로회의에 40여 명이 참석했다. 사건 이전에 날짜를 잡았다 취소를 검토하는 등 우여곡절이 많았다. 한 참석자가 “우리 모두 노 전 대통령의 죽음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수사 압박이 너무 강해 이런 사태가 왔다”고 주장했다. 이에 내 입장을 밝혔다.
“당연히 깊은 애도를 표해야 합니다. 그러나 불교는 자살을 살인으로 보고, 유교에서도 신체를 훼손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최진실 씨 자살에 이어 이번 사태로 아까운 생명을 포기하는 풍조가 생길까봐 걱정입니다.”
지금도 내 입장은 바뀌지 않았다. 노 전 대통령은 잘못이 있으면 조사를 받고, 당당하게 맞섰어야 했다. 살아서 더 할 일이 많은 분인데 너무 안타깝다.
노 전 대통령은 영세를 받은 가톨릭 신자였지만 이른바 ‘냉담자’였고 절에서 고시공부를 하는 등 불교계와 인연이 깊었다. 부인은 2002년 경남 합천 해인사를 방문해 조계종 종정 법전 스님에게 고 육영수 여사와 같은 ‘대덕화(大德華)’라는 법명을 받았다. 총무원장을 지낸 지관 스님과는 스님이 해인사 주지로 있을 때부터 가깝게 지냈다. 이런 인연으로 지관 스님은 묘역의 너럭바위에 새긴 ‘대통령 노무현’이란 글씨를 쓰기도 했다. 해인사 승려 300여 명이 이례적으로 하안거를 깨고 빈소를 조문하기도 했다.
‘생야일편부운기 사야일편부운멸(生也一片浮雲起 死也一片浮雲滅·삶도 한 조각 뜬구름이 일어남이요, 죽음도 한 조각 뜬구름이 스러짐이다) 부운자체본무실 생사거래역여시(浮雲自體本無實 生死去來亦如是·뜬 구름 자체가 본래 실체가 없는 것이니, 나고 죽고 오고 감이 역시 그와 같다네)’
정리=김갑식 기자 dunanworld@donga.com
⑫회에서 송월주 스님은 이명박 대통령(MB)과의 인연을 말합니다. 꼬이다 못해 꽈배기처럼 틀어진 불교계와 MB의 사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