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B제안 사실상 거부與 “국가원수에 대한 모독”… 24일 본회의 표결처리 시사
이 대통령이 전날 국회를 방문해 ‘한미 FTA 비준안을 통과시키면 발효 3개월 안에 ISD 재협상을 미국에 요구하겠다’고 민주당에 제안한 데 대한 역제안인 셈이다. 한국 대통령의 약속을 믿을 수 없고 미국 장관이 서명한 문서를 믿을 수 있다는 태도라는 지적이 나온다.
민주당은 이날 오전 10시 10분부터 오후 3시 35분까지 5시간 25분 동안 의원총회를 열어 이같이 결정했다. 전체 의원 87명 중 74명이 참석했다. 의총이 예상보다 길어지면서 점심은 도시락으로 해결했다.
이용섭 대변인은 의총 뒤 브리핑에서 “이 대통령의 구두 약속은 당론 변경의 사유가 될 수 없다”며 “민주당은 ‘ISD 폐기, 유보를 위한 재협상을 즉시 시작하겠다’는 양국 장관급 이상의 서면 합의서를 받아올 것을 바란다”고 말했다.
이는 기존 민주당의 주장에서 크게 진전된 것이 없는 내용이어서 한미 FTA 비준안을 놓고 여야 충돌 가능성이 더욱 고조되고 있다. 일각에선 결국 한미 간 ISD 재협상 서면 약속이 불발되고 한나라당이 비준안 강행처리를 시도하면 민주당이 물리력으로 저지하면서 거대 여당에 ‘짓밟히는’ 모습을 보여주려는 것이 아니냐는 관측마저 나온다.
▼ 강경 vs 협상 반으로 갈린 민주… 與가 밟고가길 바란다? ▼
○ 다시 공은 정부여당으로
이 대통령의 제안을 민주당이 역제안 카드로 받아치면서 공은 다시 정부여당으로 넘어갔다. 특히 정부가 ISD 폐기 또는 유보를 위한 양국 장관급 이상 합의서를 받아올 수 있는 지, 받아올 의사가 있는지에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그러나 이 대통령이 정치 현안을 놓고 국회를 처음 방문해 직접 내놓은 대국민 약속에 대해 야당이 ‘못 믿겠다. 미국 측이 서명한 문서를 받아오라’고 하자 정부에선 “도를 넘었다”는 불쾌한 반응이 나오고 있다. 정부의 한 고위 관계자는 “국가 간 협상에는 관행과 룰이 있는데 합의서를 요구하는 것은 한미 FTA를 하지 말자는 것”이라며 못마땅해했다.
한나라당도 “국가원수에 대한 모욕”이라며 격앙된 반응을 보였다. 민주당 의총이 진행되던 시간, 홍준표 대표는 당 소속 재선 의원들과 오찬을 가진 뒤 기자들과 만나 “한미 FTA를 국회법 절차에 따라 처리하기로 만장일치로 합의했다”고 밝혔다. 국회 본회의가 예정된 24일 비준안 표결 처리를 시도하겠다는 것으로 풀이된다.
오찬에 참석했던 한 재선 의원은 “한나라당이 FTA 비준안을 처리하지 않으면 존재 이유가 없다는 얘기가 나왔다”며 “홍 대표의 발언은 ‘처리’에 방점이 있다”고 말했다. 홍 대표는 기자들에게 “한미 양국의 책임 있는 분들이 ISD를 재협상하기로 했으면 그것으로 끝난 것인데 다시 해오라는 것은 외교상 무리”라며 민주당의 새로운 제안을 비판하기도 했다.
한나라당은 당초 의총을 열어 민주당 의총 결과를 놓고 한미 FTA 비준안 처리 전략을 논의하려 했으나 하루 연기했다. 민주당이 이 대통령의 제안을 거절한 것으로 간주한 것이다. 그 대신 홍 대표 등 지도부는 별도의 회동을 갖고 향후 대책을 논의했다.
한나라당 황우여 원내대표는 이날 저녁 민주당 김진표 원내대표를 만나 절충점을 찾아보려 했으나 팽팽한 견해 차이만 다시 확인한 채 별다른 성과 없이 헤어진 것으로 알려졌다.
○ 팽팽했던 강경파-협상파 대립
민주당 의총에서는 손학규 대표 등 지도부를 제외하고 26명이 발언에 나섰다. 강경파와 협상파로 정확히 반반으로 갈려 치열한 힘겨루기를 벌였다고 한다.
협상파인 김성곤 의원은 “대통령이 직접 나섰으니 정치 신뢰를 회복한다는 차원에서 대승적으로 검토해야 한다”며 무기명 투표를 통해 당론을 정할 것을 제안했다. 그러자 정범구 의원 등은 “이런 중차대한 문제를 비밀투표에 부치자는 건 비겁하다”고 반발했다. 민주당은 나중에 다시 의총을 열어 한미 FTA 비준안 처리 문제를 논의하기로 했다.
의총에 앞서 열린 최고위원회의에서도 정동영 최고위원은 전날 대통령의 제안에 대해 “독(毒) 중의 독인 ISD 조항이 든 독만두를 먹고 나서 3개월 뒤 위장을 세척하자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독이 든 걸 알면 빼고 먹어야지 독이 든 독만두를 왜 먹이려 하나”고 비판했다.
이인영 최고위원도 “이 대통령이 빈손으로 국회에 오는 것이 민망해 속이 드러나 보이는 비닐장갑을 끼고 온 것”이라고 평가절하했다. 손 대표는 “재협상 후 비준, ISD 폐기라는 입장에 변화가 없다”고 못 박았다.
이승헌 기자 ddr@donga.com
이남희 기자 irun@donga.com
윤완준 기자 zeitu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