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일대 교정서 만난 세계 최고의 천문학자
일러스트레이션 김수진 기자 soojin@donga.com
거기서 나는 내 생애 가장 명석한 학자를 만나게 되었는데 그가 리처드 라슨 교수다. 그는 그의 논문에 대한 통산 피인용 횟수가 1만 회 이상을 기록하는, 세계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천문학자다. 은하 형성 이론의 창시자인 라슨 교수의 명성은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사실 나는 유학을 떠나기에 앞서 그의 논문을 거의 모두 읽었다. 그런데 직접 만나서 보니 나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사람이었다. 명석할 뿐 아니라 생각의 깊이, 자연을 대하는 자세가 나와는 차원이 달랐다.
그 후 한두 해 동안 나는 과연 내가 태어난 목적에 부합하는 옳은 일을 하고 있는가에 대해 회의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공부를 중단하는 것도 고려했을 정도였다. 그러다 큰 그림을 발견하고 돌파구를 찾게 되었다. 경복궁을 짓는 데 얼마나 많은 사람이 필요했을까. 아마도 수천 명. 그중에서 경복궁을 설계하고 계획한 사람은 몇 명이었을까. 큰 그림을 그린 사람은 열 손가락 안에 들었을 것이다. 그 밖에 물길을 만들고, 기와를 만들어 놓고, 온돌을 마련한 사람은 또 얼마였을까. 수십 명 혹은 수백 명. 또한 그보다 훨씬 많은 수의 사람이 벽돌을 만들고 나르고 쌓았을 것이다.
이 모든 과정의 사람들이 누구 하나 더 중요하거나 덜 중요한 차이 없이 꼭 필요한 일을 했겠지. 아, 만일 라슨 교수가 은하 형성 이론의 큰 그림을 그리는 건축가라면 나는 그 그림을 이해하고 필요한 곳에 벽돌을 나르는 사람이 될 수는 있겠다 싶었다. 그런 자기 합리화가 만들어지자 다시 공부하는 것이 재미있어졌다.
인류가 삶의 답을 찾는 것은 비상구를 찾는 것에 비유할 수 있다. 위기의 상황에 수많은 문 가운데 삶의 길로 이끄는 몇 안 되는 비상구를 찾는 것은 어렵다. 참 비상구를 찾기 전에 아마도 여러 거짓 비상구를 먼저 열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궁극적으로 참 비상구를 여는 사람만이 모두를 구한 것이라고 볼 수 없다. 실패한 다른 시도들이 비상구를 찾는 데 기여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실패는 없다. 인류의 이름으로 함께 이룩한다. 500년이 지난 오늘 경복궁을 누가 만들자고 했는지는 별로 중요해 보이지 않는다. 오직 그 시대의 선인들이 뜻과 힘을 함께 모아 이룩한 그 멋진 금자탑의 가치가 높이 드러날 뿐이다.
결국 나는 라슨 교수의 제자가 되지 못했다. 그 당시엔 여러 핑계를 찾을 수 있었으나 지금 생각해 보니 내가 그의 제자가 될 만큼 준비되지 못했었던 것 같다. 하지만 땅만 바라보고 벽돌을 나르며 20년을 살아온 후 오늘 나는 라슨 교수가 창시한 은하 형성 이론을 그가 이룩한 것보다 더 깊고 넓게 연구하고 있다. 문득 눈을 들어 경복궁을 보니 그 아름다움에 눈이 부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