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예도보통지의 ‘본국검법’ 신비함에 빠져…
우리 검법을 통해 임성묵 씨가 찾고 싶은 것은 우리 고유의 사상이다. 신원건 기자 laputa@donga.com
나락에서 ‘건진’ 칼
그때 한 ‘빚쟁이’가 있었습니다. 임 씨가 그에게 직접 빚을 지진 않았습니다. 어음을 할인해 줄 전주(錢主)를 찾던 사람을 임 씨가 그에게 소개해준 게 다였습니다. 그런데 이 어음이 부도가 났으니 책임을 지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날이 퍼렇게 선 전통검을 들고 와서는 대문을 발로 차댔습니다. 덩치 좋은 남성들이 대신 올 때도 있었습니다. 고향인 충남 공주에서 어릴 적부터 틈틈이 익힌 태권도가 4단이었지만 무력했습니다.
“더는 피해서 될 문제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문제를 숨기고 피할수록 공포감에 더욱 시달렸습니다. 목숨을 던지고 두려움에 맞서야겠다는 결심을 했지요.”
임 씨는 이렇게 죽나, 저렇게 죽나 가족은 지켜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답니다. 나가서 강하게 맞섰습니다. 두려움이 사라졌습니다. 충돌도 있었지만 임 씨를 해할 명분이 부족한 그들이었습니다. 문제는 잘 풀렸습니다. 그런데 칼 앞에서 주먹의 무력함을 절실히 느낀 임 씨는 그때 칼을 배워야겠다고 마음을 먹습니다.
지인의 소개로 우리나라 전통검도를 한다는 검도단체를 알게 됐습니다. 아예 그 단체 소속으로 공주에 도장을 차렸습니다. 사업도 추스르며 단체에서 파견한 사범에게 일주일에 두세 차례 검도를 배웠습니다. 그러나 한 기술개발자의 보증을 잘못 서는 바람에 1996년 공장은 망하고 도장도 문을 닫습니다. 가족과 함께 서울로 와서는 단체의 대표에게 매달렸습니다. 임 씨는 무보수로 단체의 여러 업무를 보기 시작했습니다. 대표이자 스승이기도 한 그분은 임 씨를 가엽게 여겼는지 직접 기술을 전수해줬습니다.
검도가 아닌 검법
희한하게도 먹고살 만해지면서 검도에 더 빠지게 됐습니다. 이 땅에서 1000년 넘게 이어온 본국검법(本國劍法)과 조선세법(朝鮮勢法)을 스승에게서 배우는데 왠지 부족했습니다. 그래서 조선 정조 때 각종 무예를 정리한 ‘무예도보통지(武藝圖譜通志)’를 직접 읽으며 수련했습니다. 공주유림(儒林) 회장을 지낸 부친에게서 대학 때까지 익힌 한문 실력이 큰 도움이 됐습니다. 참, 그는 대학 시절엔 방학 때마다 고향의 향교에서 ‘논어’와 ‘맹자’를 익히기까지 했습니다.
그렇게 무예도보통지를 공부한 지 7년여, 임 씨는 기존 검도계에서 본국검법 33세(勢·자세)를 익혔다며 실연해 보일 때 왜 이질감이 느껴졌는지를 알게 됐다고 합니다. 우리 고유의 자세와 동작이 아니라 일본과 중국의 것이 섞여 있었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그는 이제 나름대로 완벽하게 무예도보통지에 그림과 글로 설명된 본국검법을 실연할 수 있게 됐다고 자부합니다. 그는 우리 ‘칼 쓰는 법’이 죽도(竹刀)를 사용하는 경기용 검도와 다른, 검법(劍法)이라고 합니다.
지난해 세계일보에 한국의 무예를 기록한 글 ‘무맥(武脈)’을 연재한 무예평론가 박정진 씨는 임 씨의 본국검법 실연을 보고 “옛것을 가장 제대로 복원한 것 같다”고 평했습니다. 그의 본국검법이 실질적이고 실전적이며 가장 자연스러운 보법(步法·발을 옮기는 법)을 보이기 때문이랍니다.
다만 문제가 하나 있었습니다. 무예계에서는 스승이 직접 가르치지 않은 기술을 제자가 쓸 수 없습니다. 심하면 파문을 당하기도 합니다. 다행히 임 씨의 스승은 2009년 고국을 떠나며 임 씨에게 단체를 맡을 의향을 물었습니다. 이제 좀 벌이가 되는 사업을 접을지 한동안 고민하던 임 씨는 민족의 혼이 담긴 칼에 매진하기로 했습니다. 임 씨는 곧 대한검법협회를 발족합니다. 그는 “목숨을 걸고 가겠다”고 말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