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만화 ‘소년탐정 김전일’ 중에서’ 》
몇 년 전이다. 한 친구가 애인을 소개하는 자리를 마련했다. 그런데 온다던 그녀가 연락이 안 됐다. 몇 번씩 전화를 걸던 녀석은 점점 사색이 돼 갔다.
“어제 말다툼을 했는데 그것 땜에 그런가? 아냐, 오다가 사고라도 났나? 한 번도 이런 일이 없었거든. 화나면 연락을 끊긴 하는데….”
“왜 이제야 와? 전화는 왜 안 받아?”
속사포로 걱정을 쏟아내는 친구. 근데 그녀가 무심하게 대꾸했다.
“휴대전화 놓고 왔는데?”
그날 우린, 둘을 ‘술떡’으로 만들어 버렸다.
설명할 필요도 없는 추리만화 ‘소년탐정 김전일’의 사건들도 마찬가지다. 도저히 빠져나갈 수 없는 밀실, 모두의 알리바이가 확실한 살인. 도저히 풀 길 없던 범죄는 알고 보면 ‘별것 아닌’ 트릭으로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든 것이다”.(김전일) 물론 천재탐정이 다 풀어내지만, 자그마한 몇몇 장치가 등장인물과 독자를 혼란에 빠뜨린다.
에피소드 ‘무구촌 살인사건’의 회전문 밀실사건이 대표적 케이스. 문이라곤 회전문 하나뿐인 방. 드나든 사람은 없는데 목 없는 시체만 덩그러니 발견된다. 문 앞에 사람이 있었기에 몰래 도망칠 수도 없었다. 마술처럼 보이던 사건의 해답은 스포일러라 밝히긴 그렇고…. 힌트는 나무로 된 회전문. 시간차를 이용해 ‘심리적 밀실’이 만들어진다. 해답을 알면 김이 샐 정도다.
하지만 이 만화의 묘미는 여기에 있다. 이런저런 설정이 얽히고설키어 범죄가 완성된다. 해결의 전체적 윤곽 역시 무심코 지나친 흔적에서 드러난다. 뭔가가 일어나건 혹은 풀려가건, 시작은 먼지 같은 데에 있는 셈이다.
그런데 이런 ‘티끌의 축적’은 사건의 실상에도 그대로 투영된다. 만화 속 범죄자들은 끔찍한 연쇄살인마지만 타고난 사이코패스는 아니다. 그들 대다수는 평범하다 못해 순수한 인물. 그러나 끔찍한 경험 탓에 악마에게 몸을 맡긴다. 숨겨졌던 뒷얘기가 드러나면 오히려 죽은 이들이 더 사악해 보인다.
다시 처음으로 되돌아가보자. 그녀가 전화기를 깜빡한 건 아무 일도 아니다. 하지만 그 ‘돌멩이’는 애인과 친구의 마음에까지 넘실대는 파장을 만들어댔다. 친구의 호들갑은 잠시 논외로 치자. 세상에는 수많은 경우의 수가 있다. 그걸 다 파악할 순 없는 노릇이다. 하지만 자기만의 잣대로 무게를 재는 건 위험하다. 당신의 무심한 균열이 때론 누군가의 댐을 무너뜨린다.
당신 자신의 삶 역시 마찬가지다. 어떤 인생이건 각자 전체를 관통하는 굵은 줄기가 있다. 한데 삶은 꼭 그런 큼지막한 덩어리들로 좌우되진 않는다. 밥 먹고 잠자고, 귀 파고 발톱 깎는…. 그 ‘지리멸렬함’이 쌓이고 쌓여 뼈대에 살을 붙인다. 우리와 세계의 빈틈을 채운다. 사소하다 치부했던 일들이 실은 ‘별것 아닌 게 아닌 것’이다.
레이 ray@donga.com
동아일보 소속. 처음에 ‘그냥 기자’라고 썼다가 O2 팀에 성의 없다고 혼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