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권순택 논설위원
국회에서의 실제 표결 상황을 보면 국회의장의 직권상정에 의한 한미 FTA 비준안 표결처리를 날치기로 몰아가는 건 무리다. 국회의원이 있는 6개 정당 가운데 한나라당뿐만 아니라 자유선진당 미래희망연대 창조한국당 등 4개 정당 의원 170명이 정상적으로 표결에 참가했다. ‘민주당과 민노당이 표결을 방해하다 실패했다’는 게 객관적인 상황 설명일 것이다. 한미 FTA 무효를 외치는 민주당이 헌법재판소에 무효 소송을 내겠다고 밝혔지만 실효성이 의심스럽다. 그동안 헌재에 청구된 날치기 법안 사건은 8건이나 되지만 한 번도 무효 결정이 난 적이 없다.
덩치 큰 사람과 작은 사람이 싸우면 덩치 큰 사람을 욕하는 게 세상인심이긴 하다. 국회에서 여야가 맞붙어 싸우다 여당이 야당 반대를 무릅쓰고 표결 처리를 강행하면 어느 정도 비난은 감수해야겠지만 무조건 여당 탓만 할 수도 없다. 여당의 표결처리를 부정적으로 보는 인식이 지배하면 야당은 양보나 타협을 할 이유가 없다. 끝까지 버티고 표결을 방해해서 날치기 소리가 나오면 실보다 득이 많을 테니까.
표결 당시 민주당 의원들은 의장석 주변에서 고함은 질렀지만 적극적으로 회의 진행을 방해하지 않았다. 회의 비공개 결정으로 TV 카메라가 보이지 않았기 때문일까. 더구나 민주당은 비준안의 본회의 통과 5시간 전인 22일 오전 11시에 이미 국회 예산결산위원회에서 한미 FTA 후속 조치 예산 55억 원을 통과시켜줬다. 비준 반대 쇼를 하면서 뒤에서 비준안 통과를 기정사실로 하고 후속조치까지 합의해줬으니 민주당이 비준안 처리를 방조했다는 주장이 나오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야당이 여당의 직권상정에 의한 표결 처리를 무조건 날치기로 모는 건 역풍을 이용하기 위해서다. 1996년 노동법 개정과 2004년 노무현 탄핵 때 톡톡히 재미를 봤다. 국회 본회의 날치기 원조로는 1958년 12월 24일 자유당 단독으로 국가보안법 개정안을 처리한 것이 꼽힌다. 반세기도 넘는 53년이 지난 지금도 우리 국회가 악습을 청산하지 못한 건 수치다. 쇼는 끝났으니 여야가 국회에 방치돼 있는 필리버스터 제도 도입 같은 국회 선진화법안들을 논의해 룰부터 새로 만들어보기 바란다.
권순택 논설위원 maypole@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