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다발 병문안 ‘정성’… 허가때까지 출근 ‘끈기’… 결국 얻은 ‘마음’
삼성물산 나진수 전 부사장(가운데)이 1995년 정유시설 시찰을 위해 방한한 아빈자 가나 에너지부 차관(오른쪽에서 세 번째) 등과 대화를 나누고 있다. 나 전 부사장은 “아프리카 시장을 뚫을 수 있었던 것은 리스크보다 신뢰를 우선한다는 신조 덕이었다”고 말했다. 홍진환 기자 jean@donga.com·나진수 전 부사장 제공
전병일 대우인터내셔널 부사장(가운데)이 바르샤바 법인장이던 1995년 대우차가 인수한 폴란드 제1 자동차업체 FSO 생산공장에서 동료들과 나란히 서 있다. 전 부사장은 “앞으로 저개발국 자원 개발 사업에 진출하면서 인프라와 플랜트까지 수출하는 데 힘써야 한다”고 강조했다. 원대연 기자 yeon72@donga.com·대우인터내셔널 제공
나진수 삼성물산 전 부사장은 24일 동아일보와 만나 1988년 네팔 남부도시 네팔간지에서 카트만두로 향하던 중 겪었던 일을 들려줬다. 당시 부장이던 나 전 부사장은 변전소 건설계약을 따낸 뒤 공사현장을 둘러보던 길이었다.
그나마 비행기는 악취만 참으면 됐지만 육로 여행은 고역이었다. 한여름 40도가 넘는 네팔 남부지역에서 에어컨도 나오지 않는 차로 700km를 이동해야 했다. 변변한 식당이 없는 것은 물론 깨끗한 물을 구하기도 힘들어 탄산음료와 삶은 계란으로 사흘을 버텼다. 비 오듯 흐르는 땀에 사타구니가 헐어 걷기조차 힘들었다. 그는 “제3세계에서 비즈니스를 하는 상사맨은 별별 경험을 다하게 된다”면서도 “그땐 고생스러웠지만 20년이 넘은 지금도 기억나는 건 그런 추억들”이라고 말했다.
“지금 아프리카라고 하셨습니까?” 1992년 6월 서울 중구 태평로 삼성본관. 나 전 부사장은 신세길 당시 사장이 내린 특별지시에 순간 머릿속이 하얘졌다. “동남아시아에서 일본과 경쟁이 치열하니 아직 미개척지인 아프리카 시장을 개척하세요.” 그때만 해도 아프리카는 세계를 무대로 뛰는 상사맨에게조차 전혀 낯선 땅이었다. 떠오르는 것은 교과서에 본 정글과 사바나뿐이었다. 하지만 이내 마음을 고쳐먹었다.
나 전 부사장은 우선 자신과 아프리카를 이어줄 접점이 어딜까 고민했다. 장고(長考) 끝에 입장을 바꿔 생각해보기로 했다. 아프리카처럼 최빈국이었던 우리나라의 과거를 떠올리자 해답이 나왔다. 세계은행(IBRD)이었다. IBRD는 당시 아프리카 각국에 상당한 규모의 경제개발 차관을 제공하고 있었다. IBRD 관계자를 통하면 차관을 제공받는 아프리카 정부 고위직에 접근할 수 있지 않을까?
그 길로 수소문해 미국 유학을 마치고 IBRD에 들어가 가나에서 4년간 일한 경험이 있다는 한국인을 소개받았다. 그를 통해 가나의 고위공무원을 알아가기 시작했다. 어느 정도 인맥이 쌓이자 가나 공무원들을 한국으로 초청해 정유시설을 견학시켰다.
친분을 쌓은 가나 공무원이 “1500만 달러짜리 석유저장탱크 시공사업을 수의계약으로 줄 수 있을 것 같다”고 귀띔했다. 하지만 쉽진 않았다. 가나의 국영 정유사 ‘TOR’ 사장이 한사코 경쟁입찰을 주장하며 정부의 수의계약 방침에 제동을 건 것이다.
○ 리스크보다 신뢰가 우선
‘위험 없이는 수익도 없다(No Risk No Return)’는 말은 해외영업에서도 진리다. 1995년 가나에서 중질유 분해시설 공사 수주를 준비하던 삼성물산은 날벼락을 맞았다. 파트너였던 일본 이토추 종합상사가 돌연 컨소시엄 탈퇴를 통보한 것이다. 이토추가 컨소시엄에서 빠지자 자금지원을 약속했던 일본 수출입은행도 등을 돌렸다.
나 전 부사장은 삼성물산 단독으로 수주를 감행하는 모험을 하기로 결심했다. 그는 “어렵게 뚫은 아프리카 시장에서 이번 일로 가나인의 신뢰를 저버릴 수 없다”며 사업을 밀어붙였다. 결국 사업 수주는 성공적으로 마무리됐고 이는 삼성물산이 1990년대 후반 가나에서 쏟아져 나온 정유 플랜트 프로젝트를 ‘싹쓸이’하는 발판이 됐다.
나 전 부사장은 “어떤 사업이건 리스크가 따르기 마련”이라며 “장애물이 생겼다고 쉽게 포기해서는 절대 안 된다는 교훈을 얻었다”고 말했다.
1993년 여름. “이렇게 좋은 차가 5000달러도 안 된다고요? 티코는 무조건 우리가 팔겠습니다.” 폴란드 최대 자동차 딜러사인 ‘폴모트’의 안제이 자라이치크 사장은 전병일 ㈜대우 바르샤바 법인장(현 대우인터내셔널 부사장)의 손을 덥석 잡았다.
‘드디어 동유럽 시장이 열리는구나.’ 전 법인장의 입가로 웃음이 새나왔다.
○ 끈기로 뚫은 경차 유럽 수출
‘장사는 자주 만나 신뢰를 쌓아야 길이 열린다’는 신념대로 전 법인장은 폴란드 자동차 안전성검사장으로 매일 출근했다. 간부들은 물론이고 말단 직원까지 골고루 눈도장을 찍으며 식사도 하고 차도 마셨다. 모르는 사람들에게도 깍듯하게 인사했다. 자존심이 강한 폴란드인들을 자극하지 않으려고 간단한 선물을 주거나 청탁을 할 때는 폴모트 직원을 통하는 등 세심한 부분까지 신경을 썼다.
그러기를 6개월여. 전 법인장은 폴란드인 검사 담당자를 마주한 자리에서 “티코는 미국, 일본에서도 이미 검증된 차입니다. 폴란드는 유럽에서 비교적 남쪽이니까 아무런 문제가 없을 겁니다”라고 집요하게 설득했다. 상대방의 눈빛이 잠시 흔들렸다. 전 법인장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준비해 간 램프 소켓을 꺼냈다. 폴란드 규격에 맞는 것이었다. “반년 뒤에 들여오는 새 차는 꼭 여기에 맞는 램프를 달겠습니다.”
전 법인장의 간절한 부탁에 검사 담당자는 못 견디겠다는 표정으로 “조건부 승인입니다. 약속은 꼭 지켜야 해요”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본국 공장에서조차 “퇴짜 맞을 게 뻔하다”며 포기했던 티코의 첫 유럽 수출이 성사된 순간이었다. 전 법인장이 녹음기처럼 읊어댄 덕분에 티코의 성능과 제원을 달달 외운 안전성검사장 직원들은 그 뒤 폴모트에 “티코를 싸게 살 수 없겠느냐”며 민원을 내기도 했다.
○ 동유럽에 세운 ‘대우 왕국’
그로부터 2년 뒤. 전 법인장은 김우중 당시 대우그룹 회장에게 “FS루블린(폴란드의 국영 상용차공장)과 협력해 차량 조립을 하겠습니다”라고 요청했다. 수입차에 35%의 높은 관세를 물리는 폴란드의 규정을 피하기 위해 아예 현지 조립을 하자는 것이었다.
“그렇게 하면 차를 몇 대나 팔 수 있겠나.” 김 회장이 물었다. “2만 대는 충분히….” 전 법인장의 대답이 채 끝나기도 전에 김 회장이 껄껄 웃었다. “에이∼ 이 사람. 고작 2만 대 팔려고, 차라리 공장을 인수해 10만 대를 팔게.” 김 회장은 곧장 폴란드의 자동차산업 주무장관을 만나 계약을 맺었다. 6개월 뒤에는 폴란드 승용차시장 점유율 1위인 FSO까지 인수했다. 동유럽 최대의 내수시장을 보유한 폴란드를 발판으로 유럽차 시장을 석권하려는 대우의 ‘세계경영’에 시동을 건 것이다.
이후 대우그룹은 내우외환(內憂外患)으로 무너지고, 대우인터내셔널도 숱한 고비를 넘기며 포스코를 새 주인으로 맞았다. 하지만 부사장이라는 더 무거운 견장을 단 전 부사장의 고민은 여전히 1990년대 초반의 폴란드 같은 새로운 시장을 찾는 일이다. 전 부사장은 “종합상사가 단순 무역으로 돈 벌던 시대는 끝났다. 이제 기회는 아프리카, 남미, 아시아의 개발도상국에 있다”고 말했다. 금융과 투자 분야의 노하우를 바탕으로 저개발국가의 자원 개발에 진출하면서 이에 필수적인 각종 인프라와 플랜트까지 함께 수출하는 복합거래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장사의 출발은 여전히 만남이고 믿음을 얻는 일”이라고 전 부사장은 강조한다. 그는 “예전 같으면 100원짜리를 110원에 팔면 칭찬받았지만 요즘은 거꾸로 야단을 맞는다”며 “눈앞의 이익보다는 신용을 쌓는 일이 훨씬 중요하다”고 힘주어 말했다.
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전성철 기자 daw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