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적압박 모친 살해 고3아들, 안방에 시체 두고 8개월 생활
“1등 해라. 명문대에 들어가라.”
좋은 성적만을 강요하는 한국 사회의 병폐가 또다시 패륜범죄를 불렀다. 대학 입학을 앞둔 고3 수험생이 “왜 1등을 못하느냐”며 자주 체벌을 가하고 폭언하는 친어머니를 살해했다. 전문가들은 “범행을 저지른 아들과 좋은 성적을 강요한 어머니 모두 성적 지상주의 풍조의 희생양”이라고 분석했다.
서울 광진경찰서는 올 3월 13일 오전 11시경 서울 광진구 구의동 한 다세대주택 안방에서 어머니 박모 씨(51)를 부엌에서 가져온 칼로 찔러 살해한 혐의(존속살인 등)로 K고 3학년 지모 군(18)을 24일 구속했다. 지 군은 이후 약 8개월 동안 시신을 방안에 방치하고 부패해 냄새가 나자 공업용 본드로 방문을 밀폐하는 등 범행 사실을 숨겨온 혐의도 받고 있다.
24일 동아일보 기자와 만난 지 군의 아버지(52)는 “아내가 아들이 어릴 때부터 말을 듣지 않으면 심하게 잔소리를 하고 체벌을 했다”고 말했다. 지 군은 경찰에서 “아버지가 집을 나가 별거하기 시작한 2006년부터 어머니의 완벽주의와 성적 집착이 더 심해졌다”고 진술했다. “너는 의지가 약하다”며 밥을 주지 않거나 잠을 못 자게 했다. 지 군은 사건 전날 밤에도 오후 10시부터 다음 날 오전 8시경까지 약 10시간 동안 엎드려뻗친 채 골프채로 맞으며 밤새 잔소리를 들어야 했다. 지 군은 밤새 자신을 꾸짖은 뒤 안방에서 잠든 어머니를 흉기로 살해했다.
사건 다음 날인 14일로 예정된 학부모회가 범행의 결정적인 이유였다. 학교에서 어머니가 자신의 진짜 성적을 알게 되면 큰일이 날 것으로 생각한 지 군은 조급해졌다. 지 군은 중학교 때부터 성적표를 위조해 왔다. 중상위권 성적으로는 어머니의 질책을 감당할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지 군 진술에 따르면 전국 모의고사에서 5000등 안팎의 성적이 나와 이를 전국 62∼67등으로 고쳤을 때도 어머니는 “전국 1등을 해 서울대 법대를 가라”며 꾸짖었다고 한다. 지 군은 경찰에서 “어머니가 학교에서 성적표를 위조했다는 사실을 알면 더 심한 체벌과 잔소리를 할까 두려웠다”고 진술했다.
지 군 아버지에 따르면 지 군은 중학교 1, 2학년 때 해외유학을 다녀오고 한때 구청장상을 받을 정도로 모범생이었다. 그러나 학교 측에 따르면 고등학교 1학년 1, 2등급이었던 지 군의 내신등급은 2학년 3, 4등급, 범행 이후인 3학년 때는 6, 7등급으로 떨어졌다. 이번 대학수학능력시험 성적은 가채점 결과 전체 9등급 가운데 3등급이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 범행 사실 8개월간 숨겨와
K고 관계자는 “3월경 지 군이 담임교사와 상담을 하며 ‘어머니와 성적 문제로 갈등이 심하다’고 한 적이 있다. 자주 무단결석을 했지만 그 외에 별다른 문제를 일으키지 않아 따로 조치하지는 않았다”고 말했다. 주변 주민들에 따르면 지 군은 범행 뒤 거의 매일 친구들을 집으로 불러 함께 놀았으며 여학생이 드나들기도 했다. 지 군의 아버지는 “엄마가 어디 갔느냐고 물었을 때 ‘(범행 당일인) 3월 13일에 싸우고 더는 같이 살지 않기로 했다’고 한 적이 있다”고 말했다.
○ “죽고 싶었지만…”
지 군의 범행이 드러난 것은 사건 발생 뒤 약 8개월이 지난 11월 22일. 이날 저녁 집을 찾아온 아버지는 “어머니는 어디 가셨냐”고 물었다. 아들이 제대로 답변을 못하는 데다 안방에서 이상한 냄새까지 풍겨 나오자 지 씨는 이를 수상히 여겨 인근 소방서와 지구대에 신고했다. 지 군은 오후 11시경 현장에 도착한 경찰이 안방 문을 왜 밀폐해 뒀는지 추궁하자 그제야 범행을 시인했다.
지 군의 아버지는 “아들이 범행이 드러난 뒤 ‘아빠까지 날 버릴까봐 두려워 말 못했다’고 하더라. 아내와의 불화를 견디지 못하고 집을 나온 내 탓이다”라고 말했다. 지 군 역시 경찰 조사를 받으며 “제가 잘되라고 그랬던 어머니 마음은 이해했지만 두려웠다. 수없이 악몽을 꿨고 죽고 싶다는 생각도 수차례 했지만 뻔뻔스럽게 살아있었다”며 후회한 것으로 전해졌다.
이유진 한국청소년정책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예전에는 아이들이 부모와 갈등을 겪을 때 자살 쪽을 많이 선택했다면 요즘은 부모를 가해하는 경우가 늘어나고 있다”고 말했다.
김태웅 기자 pibak@donga.com
정윤식 기자 jys@donga.com
이새샘 기자 iamsam@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