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이 지난 지금 ‘인권위 진정 1호’인 이 씨는 강원 춘천소년원에서 의사로 일하고 있다. 그는 인권위 결정을 앞세워 해당 보건소와 소송을 벌여 승소했고 그 뒤로 법무부의 도움을 받아 10년째 이 소년원에서 일해 왔다. 인권위 설립 10주년을 앞두고 그는 “당시 정말 절박했고 하소연할 곳조차 없던 내게 인권위는 최후의 보루였다”며 “인권위가 앞으로도 소외된 약자들에게 든든한 빛이 돼주길 바란다”고 말했다.
○ 명(明)-폐쇄적 공간 인권침해 파헤쳐…권고 86.4% 수용돼
인권위가 25일로 설립 10주년을 맞는다. 설립 첫날 122건의 진정으로 출발해 어느새 10년 동안 접수한 진정만 37만8372건이다. 이 중 권고의 경우 86.4%를 대상 기관이 모두 혹은 일부 수용했다.
특히 인권위는 군부대 경찰서 교도소 등 폐쇄적이고 밖으로 잘 드러나지 않던 공간의 인권 침해 실상을 파헤쳤다. 2003년 경기 연천군 최전방 감시초소에서 발생한 총기난사의 배경에 부대 내 가혹행위가 있었음을 밝혀낸 데 이어 2005년 육군훈련소 내에서 훈련병들에게 인분(人糞)을 먹게 한 사건을 조사하고 군대 인권 향상을 위한 제도 개선을 권고했다. 지난해 9월에는 참모장에게 성추행을 당한 해병대 상병이 의가사제대할 수 있도록 조치했다. 이 밖에 서울 양천경찰서에서 벌어진 ‘날개꺾기’ 등 가혹행위 파문 관련자를 검찰에 고발했고 교도소 내 재소자 인권 침해 행태도 바로잡았다.
우리 사회의 약자인 장애인, 이주 외국인, 여성의 인권도 높였다는 평가다. 10년간 들어온 전체 차별 진정 건수 가운데 장애 차별 관련이 4372건(38.7%)으로 가장 많았다. 인권위는 장애인 보험 가입 거부 문제와 관련해 개선 권고를 내렸고 열악한 장애인 시설을 수사기관에 고발했다. 2003년에는 여성 간호사를 성희롱한 서울대 의대 A 교수에 대해 인권 교육을 지시했고 서울대 총장과 병원장에게 성차별 예방 대책을 세울 것을 권고하기도 했다.
○ 암(暗)-내부 갈등에 현실 도외시한 권고 논란도
10년간 한결같이 지적돼 온 문제도 있다. 대표적인 것이 인권위의 구조적 한계다. 인권위는 위원장을 포함해 대통령과 국회, 대법원장이 지명한 11명의 위원으로 구성된다. 이들은 격주로 전원위원회를 열어 안건을 통과시키는데 위원들 간 성향 차 때문에 합의에 이르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위원과 위원, 위원과 직원 갈등 속에서 2006년 조영황 위원장이 돌발 사의 표명을 하기도 했고 지난해 11월에는 “현병철 위원장과는 함께 일할 수 없다”며 전문·자문·상담위원 61명이 집단 사퇴하는 일도 있었다.
위원들 간 견해차로 인권위가 주요 사안과 관련해 시의적절하게 판단을 내리지 못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출범 초기부터 북한 인권 문제에 대해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는 인권위 안팎의 주문이 이어졌지만 인권위는 2006년 ‘북한 인권 문제에 대해서는 직접 개입하지 않겠다’는 공식 입장을 밝혀 비판을 받았다. 인권위는 올해 들어 북한인권침해신고센터를 개소하고 본격적으로 탈북자와 북한 주민 인권 보호를 위해 노력하고 있다.
지나치게 이상적이고 현실성이 떨어지는 권고를 내려 사회적으로 논란을 일으킨 적도 많다. 2003년 교육행정정보시스템(NEIS) 논란과 관련해 “인권 침해 소지가 있다”며 교무 학사, 입학 및 전학, 보건 등 3개 영역을 제외할 것을 권고해 수시모집 등 대입 일정에 혼란을 일으켰다. 2004년에는 국가기관 최초로 국가보안법 전면 폐지를 권고한 데 이어 2005년에 사형제 폐지를 권고해 사법부와 의견 충돌을 빚기도 했다.
인권위는 설립 10주년을 기념해 25일 오전 10시 서울 중구 태평로 한국프레스센터 20층에서 행사를 열고 두오균 사단법인 대전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장과 가온장애인인권·행복위원회 등에 인권상을 수여한다.
김지현 기자 jhk85@donga.com
고현국 기자 mck@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