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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2/현장 체험]항공기 래핑 작업

입력 | 2011-11-26 03:00:00

“어휴, 흠집 날라” 필름 도려내던 칼 황급히 빼앗아




23일 오후 부산 강서구 대한항공 테크센터 안 도장 격납고에서 에이디웍스 직원들이 ‘B747-400’ 항공기에 래핑작업을 하고 있다. 기자가 작업에 참여한 부분은 비행기 중앙 쪽에 자리한 세종대왕 그림 일부였다. 부산=신원건 기자 laputa@donga.com

‘좌측 세종 E-3-1.’

세종대왕의 턱수염 일부와 오른쪽 어깨 부분 용포를 그린 부분이다. 그림이 인쇄된 가로 120cm, 세로 100cm 크기의 항공기 외부 전용필름(모델명 VS7704)을 조심스럽게 항공기 동체의 지정된 지점에 붙였다. 창문이 있는 부분이라 필름을 창문틀 모양에 맞춰 칼로 도려내야 한다. 커터를 가만히 가져다 댔다. 3cm쯤이나 이동했을까.

“어휴, 안 되겠네요. 여긴 제가 자를게요.”

작업을 지켜보던 장진용 씨(39)가 황급히 기자가 쥔 칼을 ‘회수’했다. 항공기 겉면에 스크래치라도 나는 날이면 운행 시 심각한 안전문제를 일으킬 수 있다는 게 이유다. 그의 동료이자 친형인 진호 씨(43)도 한숨을 내쉰다. 체험에 나섰다 민폐만 끼치게 된 터라 민망함을 뒤로하고 한발짝 물러섰다. 작전상 후퇴다. ‘자르기’를 마친 진용 씨가 재도전 기회를 줬다. 완전히 자리를 확인한 ‘좌측 세종 E-3-1’을 떼어낸 뒤 기포가 들어가지 않도록 다시 꼼꼼히 붙였다. 작업복이 유난히 더웠다. 하나만 주면 정이 없다고 생각해서였을까. 진용 씨가 ‘좌측 세종 E-3-2’를 손에 쥐여줬다. 세종대왕 그림의 왼쪽 배경이 될 산봉우리 부분. 창과 같은 장애물이 없어 그나마 손쉬운 곳이다. 시트지 붙이는 것과 뭐가 다르겠냐는 생각은 오산이었다. 진호 씨가 도왔지만, ‘좌측 세종 E-3-2’를 붙이는 데 5분이 걸렸다. 몇 장 더 붙여보겠다고 고집을 부렸다가는 작업 시간이 기하급수로 늘어날 판이었다. 하나의 가격이 30억 원을 호가한다는 TP(Telescopic Platform·천장에 매달린 3차원 전방위 작업대)가 천천히 아래로 내려갔다. 그리고 기자도 지상으로 내려졌다. 지상 7∼8m 지점으로 올라간 지 1시간여 만이었다.

치밀함의 예술, 항공기 래핑(Wrapping)


23일 오후 부산 강서구 김해국제공항 인근에 위치한 대한항공 테크센터의 ‘도장 격납고(Paint Hangar)’. 전체 길이 231피트10인치(약 71m), 양 날개와 몸통을 합친 폭 213피트(약 65m·연료가 가득 찼을 때 기준)에 이르는 B747-400 항공기가 새 옷을 갈아입는 중이었다. 대한항공이 어린이들을 대상으로 ‘내가 그린 예쁜 비행기’ 사생대회를 열어 최우수작 1점을 항공기에 맞도록 디자인해 래핑하는 작업이다. 3번째인 올해는 ‘외국친구들에게 소개하고 싶은 아름다운 우리나라’라는 주제로 대회가 열렸다. 이날은 래핑 작업 3일째, 공정이 60∼70% 진행된 시점이었다.

지난해 10월 ‘내가 그린 예쁜 비행기’ 사생대회 최우수작품을 붙이고 미주 및 유럽노선을 운항 중인 ‘B777-200’.

전체적인 프로젝트 지휘와 TP 조종은 대한항공이, 실질적인 래핑작업은 전문회사 ‘에이디웍스’가 맡았다. 이번에는 특히 1회(B737-900)와 2회(B777-200) 때보다 몸집이 훨씬 큰 국제선용 항공기 ‘B747-400’이 투입됐다. 항공기 동체 면적의 3분의 1만 덮는데도 가로 120cm, 세로 100cm의 프린트 용지 280장(좌우 각 140장)이 소요된다.

래핑의 첫 번째 단계는 격납고에 들어온 항공기를 세척하는 것이다. 대한항공 측은 지난주 직원 8명을 8시간 동안 투입해 항공기 구석구석을 깨끗하게 닦았다. 이후 부착예정 위치를 실측한 뒤 그 자료를 토대로 도면을 설계했다. 수차례의 검토를 거치고, 모형 항공기(50분의 1)에 시뮬레이션까지 한 뒤에야 도면이 최종 확정됐다. 열전사 방식을 쓰는 스카치프린트로 항공기 전용필름(영하 60도에서 영상 50도까지 견딜 수 있는 특수 재질)에 출력하고, 출력물에 실크스크린 방식의 액체코팅을 한다. 단위 크기별로 재단해 인쇄된 면에 보호용 테이프(APP)를, 접착면에 이형지(접착면을 보호하기 위해 붙이는 종이)를 붙이면 준비는 끝.

그런데 여기부터가 진짜 중요하다. 후가공이 완료된 그래픽을 항공기에 가부착한 뒤 아래→위, 꼬리→머리의 순으로 한 장씩 붙여나간다. 각 필름은 6∼15mm씩 겹쳐 붙인다. 이 순서는 1만 m 상공에서 시속 900km의 속도로 운항하는 항공기의 특성상 바람의 저항을 최소화하기 위한 철칙이다. 화물칸, 비상구, 창문 등과 겹치는 부분이나 외벽의 요철이 있는 부분의 필름을 모두 잘라내 운항에 차질이 없도록 하는 것도 주요 포인트. 필름 부착이 끝나면 에지 실러(Edge Sealer)를 발라 필름의 모든 가장자리를 봉합한다. 마지막으로 그래픽 사이사이에 항공기의 겉면이 드러난 부분을 항공기용 특수페인트(하이솔리드폴리우레탄)로 칠하면 완성이다.

이 모든 과정에서 항공기 동체에 스크래치가 가지 않도록 주의하는 것은 너무나도 중요하다. 대한항공 정비본부 기체수리팀의 강만수 부장은 “운항 도중 기체가 스트레스를 받으면 가장 약한 부분이 깨질 수 있기 때문에 아주 작은 흠집도 큰 재앙이 될 수 있다. 실제 그런 이유로 사고가 생긴 적도 있다”고 강조했다.

페인트칠에 비하면 래핑은 ‘양반’


대한항공은 1998년 580억 원을 들여 부산 테크센터에 도장 격납고를 지었다. 가로 76m, 세로 85m, 높이 23.2m의 이 거대 구조물은 언뜻 보면 그냥 창고처럼 보인다. 그러나 당시로는 미국과 독일에만 있던 최신식 시설이다. 천장에는 디퓨저(Diffuser·공기가 세게 뿜어지게 하는 장치) 170개가 설치돼 있고, 페인트 작업을 할 때는 지하에 진공층이 형성된다. 이 장치 덕분에 작업 도중 생긴 페인트 가루나 먼지는 모두 지하로 빨려 들어가게 된다. 이것이 넓은 격납고의 실내 어디서도 페인트 자국을 찾아볼 수 없었던 이유다. 또한 중앙컴퓨터가 페인트 작업에 적합한 온도와 습도를 자동 조절한다. 이 격납고는 지난 13년간 공군 1호기를 포함해 286대의 항공기에 새 옷을 선사했다.

비행기에 페인트를 다시 칠하려면 매우 복잡한 과정을 거쳐야 한다. 기존 페인트를 모두 벗겨낸 뒤 비눗물 세척, 산성 물질을 활용한 오염 제거, 케미컬 코팅 등을 거치고, 페인트 흡착을 위한 프라이머(Primer·전 처리 도장용 도료)를 붙인 뒤에야 페인트를 칠할 수 있다. 돈도 많이 든다. 이번에 래핑한 B747-400의 경우 전체 도장에 5드럼(250갤런)의 페인트가 쓰이는 등 재료비만 9000만 원에 이른다. 기간도 열흘은 족히 잡아야 한다.

이에 비하면 래핑은 상대적으로 간단한 작업에 속하는 편이다. 대한항공은 2002년 한일월드컵을 앞두고 5대의 비행기에 ‘슛돌이’ 그래픽을 붙인 것을 시작으로 가수 비의 월드투어 홍보(2007년), 루브르 박물관(2008년)과 대영박물관(2009년)의 한국어 서비스 기념, 블리자드의 스타크래프트2 홍보(2010년), 내가 그린 예쁜 비행기 1, 2회(2009, 2010년) 등 7차례에 걸쳐 항공기를 래핑했다. 기자가 참여한(?) 래핑이 이 회사로서는 8번째 작업인 셈이다.

부산=김창덕 기자 drake007@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