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성희 논설위원
내가 누군지 모르겠다는 청년들
잘난 척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시대는 정말 그랬다. 성적표에 ‘권총(F학점)’이 수두룩하고, 스펙을 쌓기 위한 ‘해외 연수’는 개념도 없을 때였다. 대학생들이 만나면 나라 걱정이 넘쳤지만 취업 걱정은 안 했다. 웬만한 대학만 나와도 기업에서 모셔 가려고 줄을 섰고, 직장을 골라 갈 수 있었다. 그러니 어느 응시자가 “기자가 되기 위해서 영혼을 팔 수도 있을 것 같다”는 대목이 들어간 자기소개서를 읽었을 때나 집안 조카가 나이 서른에 직장을 못 구해 머리카락이 다 빠졌다는 얘기를 들을 때 ‘안쓰러운 세대’라는 생각이 들었다.
청년실업은 우리나라만 겪는 문제는 아니다. 미국 컨설팅회사 트웬티섬싱의 조사에 따르면 올해 미국에서 대학을 졸업한 300만 명 가운데 85%가 일자리를 구하지 못하고 낙향했다. 호프(2003년 사망한 미국 코미디 황제 밥 호프를 말하는 것으로 ‘희망’과 동의어)도 가고 잡스(올해 사망한 스티브 잡스를 빗댄 말로 ‘일자리’란 뜻도 있다)도 없다는 자조 섞인 한탄이 나오고 있다. 미래학자 제러미 리프킨이 저서 ‘노동의 종말’을 통해 “세계 경제는 노동의 본질이 변화하는 과정에 놓여 있으며 기술진보로 인해 실업자가 양산된다”고 예고한 것이 1995년이다. 불행하게도 예언은 소름 끼치게 맞아떨어지고 있다. 요즘 실업은 경기 변환에 따른 일시적인 현상이 아니라 구조적인 문제다.
수치상으로 미국이나 유럽보다 사정이 훨씬 나은데도 우리 청년들의 체감실업률이 높은 이유는 최고 수준의 대학 진학률, 취약한 사회안전망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일자리 눈높이를 높인 데는 미디어의 책임도 크다. 아무리 가난한 사람도 뉴스와 안방 드라마를 통해 재벌가를 엿볼 수 있다. 세상의 중심은 ‘나’라고 배웠고 톱스타와 스포츠 영웅을 선망하는 청년세대는 현실은 남루해도 기대 수준만큼은 높다. 삶이 생각대로 풀리지 않을 때 자신을 탓하기보다는 사회와 제도를 바꿔야 한다는 생각이 앞선다.
직업의 패러다임 바뀌고 있다
정부의 무능을 비판하는 사람들도 또렷한 대안을 내놓지는 못한다. 기업이 고용을 이끌어 가던 시대는 저성장이 고착되면서 한계에 봉착하고 있다. 예산으로 공공부문 일자리를 늘린 그리스 모델은 실패로 판명 났다. 근로시간을 줄여 일자리를 공유하려 한 프랑스 모델(오브리법)도 효과를 보지 못했다. 샐러리맨의 마지막 탈출구인 자영업도 무너지고 있다. 노동력을 제공하고 임금을 받는 전통적 개념의 일자리가 사라지는데 우리만 환상의 일자리를 좇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직업 전문가들은 매년 미래의 직업을 발표하지만 진짜로 고민해야 하는 것은 직업의 미래가 아닐까. 만성적 실업이라는 환경에 적응하면서 살아가야 하는 시대가 다가오는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