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강남구 청담동의 카페에서 만난 영화배우 이민정 씨는 “책은 한 사람의 인생을 만나는 통로”라고 말했다. 홍진환 기자 jean@donga.com
배우 이민정 씨(28)는 올해 5월 화보 촬영차 프랑스 파리를 찾았다. 낮에는 마레 지구를 걷고, 저녁엔 센 강을 가로지르는 ‘퐁데자르’(예술의 다리)에 털썩 주저앉아 강바람을 맞으며 와인을 마셨다. 아무도 쳐다보는 사람이 없는, 낯선 곳에서의 여유였다. 화보 촬영을 끝내고는 친구가 살고 있는 영국 런던으로 홀로 건너갔다.
“런던으로 가는 유로스타에서 바라본 창밖 풍경이 잊혀지지 않아요. 책을 읽다가 졸아 옆에 앉아 있던 유럽 아저씨의 어깨에 닿을 뻔했지요. 대학 3학년 때 유럽 배낭여행을 다니면서는 영국에 거주하는 작가 알랭 드 보통이 쓴 ‘여행의 기술’ ‘불안’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 같은 책을 읽었어요. 런던에서 이 책을 다시 읽으니까 정말 신나더군요. 어제 걸으면서 보았던 장소가 책에 그대로 나오니까요!”
그러나 그가 갑자기 신데렐라처럼 ‘짠!’ 하고 나타난 배우는 아니다. 성균관대 연극영화과에서 연출을 공부하며 영화감독을 꿈꾸던 시절이 있었고, 대학 졸업 후 연극무대에서 견뎌온 2년의 세월이 지금의 밑바탕이 됐다. 그런 그에게 책과 여행은 늘 내일을 꿈꾸게 하는 에너지 보충제였다.
“연출가나 감독은 천재들이나 하는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대학 시절 책을 많이 읽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있었어요. 연극영화과를 다녀 기본적으로 셰익스피어를 다 읽어야 했고, 안톤 체호프, 헨리크 입센의 작품을 읽었어요. ‘시나리오 작법’ 책에도 관심이 많았죠.”
―직접 쓴 희곡이나 시나리오가 있나요.
“써놓은 건 몇 편 있는데, 세상에 내놓지 않았어요. 1년 뒤 내 작품을 읽어보니까 손발이 오그라들 것 같더라고요. 불에 태워 버릴까 하다가, 마흔 살 넘어 꺼내 보면 재밌겠다고 생각했어요. 엄마라도 볼까 봐 상자 속에 꼭꼭 숨겨놨어요. 유명한 작가들도 나중에 자기가 쓴 초기 작품을 보면 민망해지겠죠?”
“제일 좋아하는 책은 법정 스님의 ‘무소유’예요. 저는 기독교 신자지만 그 책을 읽으면 마음이 편해져요. ‘아무것도 갖지 않았을 때 세상을 다 갖게 된다’는 이야기를 해주잖아요. 너무 가지려고 집착하고, 아웅다웅 살다 보면 결국은 다 잃게 되는 법이죠. 배우들에게 대중의 인기도 그런 것 같아요.”
이 씨는 ‘책의 향기’ 독자들에게 자신이 최근 읽은 책으로 김애란의 소설 ‘두근두근 내 인생’(창비)과 김상운의 ‘왓칭’(정신세계사)을 소개했다. 이 씨는 “김 작가는 단편소설집 ‘달려라, 아비’ ‘침이 고인다’ 때부터 광팬”이라며 “그의 글은 정말 해학적이다. 뻔한 일상인데도 눈물이 나고, 심각하다가도 웃음이 터진다”고 말했다.
“‘두근두근 내 인생’에서 희귀병을 앓는 주인공이 e메일로 만난 소녀를 평생 처음 사랑하잖아요. 그런데 나중에 알고 봤더니 e메일을 주고받던 소녀는 사실은 마흔 살 아저씨였어요. 정말 충격적이었죠. 책을 읽는 내 손에 주먹이 쥐어지고, 부르르 떨리더라고요. 그런데 한편으로 생각해 보니까 그 아저씨에게도 연민이 느껴지더라고요. 현대인의 외로운 모습이랄까. 얼마나 외로웠으면 자신을 숨겨서라도 타인을 만나고 싶어 했을까….”
이 씨는 “‘왓칭’은 한 달 전에 팬이 ‘스티브 잡스’ 전기와 함께 선물해 준 책”이라고 소개했다. ‘왓칭’은 자신의 내면 상태를 제3자의 눈으로 관찰하는 것만으로도 몸과 지능, 운명이 바뀔 수 있다는 자기계발서다.
이 씨는 “배우라는 직업은 내게 없었던 일을 상상하는 것인 만큼 이 책의 메시지가 큰 도움이 됐다”고 했다. “배우가 자신의 배역에 대한 스스로의 믿음과 확신이 없으면 관객도 그 배우의 연기를 믿지 않기 때문”이다.
“내년 1월 개봉하는 영화 ‘원더풀 라디오’에서 전직 아이돌 스타 출신 여가수 역할을 해요. 현재는 라디오 DJ를 하면서, 여전히 잘나갔던 옛날만 그리워하는 여자죠. 영화 초반과 마지막 장면에 제가 댄스가수로 무대에 서는 장면이 나옵니다. 제가 가수를 해본 적이 없는데, 진짜 댄스가수처럼 보여야 하는 도전이었죠. 배우에게 스스로를 제3자로 바라보는 ‘왓칭’의 기법은 무척 중요한 것 같아요.”
아직도 ‘영화감독’의 꿈을 잃지 않고 있다는 이 씨는 “어릴 적 보았던 영화 ‘패치 아담스’처럼 따뜻하게 가슴을 울리는 작품을 만들고 싶다”고 말했다.
전승훈 기자 raphy@donga.com
◇두근두근 내 인생/김애란 지음/창비
가장 어린 부모와 가장 늙은 자식의, 가슴을 두근거리게 하는 청춘과 사랑에 대한 이야기. 벅찬 생의 한순간과 사랑에 대한 통찰을 엿볼 수 있는 소설.
◇왓칭/김상운 지음/정신세계사
“자신을 제3자의 눈으로 관찰하는 것만으로 모든 고통이 해결된다”고 역설. 운명 바꾸기, 몸, 지능, 성적, 위기극복, 화 누그러뜨리기, 인생설계 등 7가지 ‘왓칭 요술’을 과학적으로 풀어낸 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