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TA 전쟁에서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면 후퇴하는 것이다”
김현종 전 통상교섭본부장은 투사와 전략가의 모습을 모두 갖춘 듯하다. 웃을 때도 크게 활짝 웃지 않는다. 복잡한 현상도 쉽게 설명하고 국내외 통계 수치를 근거로 제시한다. FTA 협상 이야기는 한 편의 무협지처럼 흥미진진했다. 서영수 전문기자 kuki@donga.com
노 전 대통령은 2003년 대통령 당선자 시절 세계 통상현안에 관해 브리핑을 한 세계무역기구(WTO) 수석변호사를 눈여겨보았다가 정부로 불러들였다. 노 전 대통령은 가끔 김 전 본부장에게 “당신과 잘 통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대통령의 편애에 가까운 신임을 받다보니 적이 많아져 ‘FTA 정책을 마음대로 한다’는 비판을 들었다. 한미 FTA 협정 체결 직후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유엔대사로 자리를 옮겼다. 김 전 본부장은 요즘도 이따금 봉하마을을 찾는다.
미국 출장 중인 그에게 국회의 비준동의안 통과 소식을 문자로 알려주니 몇 시간 후 전화를 걸어왔다. “한미 FTA는 목적이 아니라 과정이다. 한국이 다음 단계로 나아가는 발판, 플랫폼이 마련된 것이다.” 그가 출장길에 오르기 전에 두 차례 만나 FTA에 관해 긴 이야기를 나눴다.
―한미 FTA의 기대 효과는….
“한국과 중국의 100대 주력 수출상품 중 미국 시장에서 30여 개가 겹친다. 우리 수출품이 무관세로 들어가면 일본 중국 상품에 비해 경쟁력이 높아질 것이다. 한국이 주요 20개국(G20) 멤버로 초청받고 근자에는 ‘코리아 디스카운트’ 대신 ‘코리아 프리미엄’이 붙고 있다. 선진국들이 줄줄이 신용등급을 강등당하는 판에 한국은 상향됐다. 이 모두가 한미 FTA에 대한 기대 효과가 반영된 결과다. 한국의 신용도가 올라가면 남북통일 이후 북한 땅에 인프라를 구축할 때 차입 비용을 줄일 수 있다. 버락 오바마 미 대통령은 지난해 ‘한미동맹은 한국과 미국뿐 아니라 태평양 전체 안보의 린치핀(linchpin)’이라고 표현했다.”
린치핀은 자동차나 마차의 수레바퀴가 빠지지 않도록 고정시키는 핀으로 아주 중요하고 핵심적이라는 의미다.
―한미 FTA 재협상으로 한국이 손해를 보았다는 불만이 나온다.
“큰 틀에서 보면 우리가 여전히 유리하지만 추가협상을 잘했다고 볼 수는 없다. 미국이 한국 자동차 수입이 많아질 경우 관세를 과거처럼 부과할 수 있게 세이프가드를 허용한 것은 우리에게 큰 부담이다. 3000cc 이하 자동차의 관세 철폐를 4년 늦춰주고 우리가 돼지고기 목살 관세 철폐 2년 연장을 받은 것도 국민에겐 손해로 비칠 것이다. 미국이 경쟁력이 있는 픽업트럭의 관세 인하가 8년 후로 미뤄져 우리 기업의 진출과 투자유치가 그만큼 늦춰질 수 있다.”
―추가협상을 피할 수는 없었나.
“2007년 6월 30일 한미 FTA 협정 서명 때 수전 슈워브 미 무역대표가 공개적으로 ‘재협상은 없을 것’이라고 했다. 3년 후 미국이 ‘우리가 불리하다’며 추가협상을 요구한 것은 적절치 않았다. 이명박 정부는 필사즉생(必死則生·죽기로 싸우면 반드시 산다)의 자세로 나갔어야 했다. 한국이 유럽연합(EU)과 FTA를 맺어 농산물을 수입하기 시작하면 농산물을 수출하는 미국 35개 주 상원의원들이 나서서 미국이 한미 FTA를 비준하도록 압박했을 것이다. 농산물 수출국인 호주나 캐나다와 FTA를 맺어 미국을 전략적으로 압박할 수도 있었다.”
김 전 본부장은 “추가협상으로 ‘한국은 밀면 밀린다’는 나쁜 선례를 남겼다”며 아쉬워했다. 그가 참여하지 않았기 때문에 추가협상을 더 부정적으로 보는지도 모르겠다. 그는 “추가협상을 할 바엔 반대급부를 제대로 챙겼어야 했다”면서 불평등한 한미 주둔군지위협정(SOFA) 개정, 동해 표기, 우라늄 농축 및 재처리권 등을 꼽았다. 자동차 문제도 FTA 협정문에 손대는 대신에 우리가 장차관 관용차와 경찰용으로 캐딜락을 사주고 미국 차 소비 확대를 위한 태스크포스(TF)를 설치하는 식으로 마무리했더라면 좋았을 것이라고 그는 덧붙였다.
―FTA 협상에서는 때로 막판까지 가는 벼랑 끝 전술도 구사해야 하는가.
“일본과 김 수입 쿼터 협상 때는 일본을 WTO에 제소하는 강수를 둬 성과를 냈다. 미국이 우리에게 관심을 갖게 하려고 캐나다와 먼저 FTA 협상을 시작했고 EU와의 협상으로 미국을 초조하게 만들었다. 이런 전술이 성공하려면 남다른 정보가 있어야 한다. 한미 교섭이 난관에 빠지자 조지 W 부시 미 대통령이 카타르를 방문한 노 대통령에게 전화를 걸었는데 경제 라인이 아니라 안보 라인을 통해 했다는 것을 알아냈다. 미국도 한미 FTA를 안보 차원에서 중시하고 있다는 의미다. 이런 판단에서 미 협상대표에게 강하게 요구해서 상당 폭 반영시킬 수 있었다. 순간순간 작은 것도 놓치면 안 된다. 때로는 상대방 편을 들어주는 듯이 선의의 거짓말도 할 필요가 있다.”
―미국으로부터 전문직 비자를 확보했나.
“미국에 최소한 호주 수준(1만500개)의 쿼터를 요구하자 토니 에드슨 당시 미국 비자담당 차관보가 ‘수용할 수 있는 수준’의 쿼터를 약속하는 서한을 보내왔다. 통상교섭본부 간부들에게 후속 처리를 잘하라고 지시해 놓고 유엔대사로 자리를 옮긴 뒤에 보니 마무리가 안 돼 있었다. 우리 일자리가 걸린 중대한 문제이므로 통상교섭본부가 꼭 받아내야 한다.”
―개성공단 생산품의 한국 원산지 인정은 어떻게 되나.
“북한이 2006년 핵실험을 한 직후 진행된 FTA 협상이어서 미국 네오콘(신보수주의자)들의 반대가 심해 개성공단에서 생산한 제품의 한국 원산지 인정을 받아내기 어려웠다. 그래서 장차 논의할 때 우리가 유리하도록 두 가지를 협약(부속서 22-나)에 집어넣었다. 이 부분이 미국 내에서 정치적 쟁점이 될까봐 미국 의회가 비준할 때까지 공개적으로 거론하지 않았다. 협상 후 우리 정부의 극히 일부에만 보고했고 이번에 처음으로 상세하게 밝히는 것이다. 첫째는 ‘미국은 한국 헌법에 기재돼 있는 권한을 인정하며’라는 표현을 집어넣어 헌법 제3조의 영토조항에 의거해 남북한 거래를 민족의 내부거래로 본다는 해석이 가능하게 했다. 둘째는 ‘남북한 관계’를 영어로 ‘inter-Korean relations’이 아닌 ‘intra-Korean relations’로 표기했다. 남북한 두 나라 간 관계가 아니라 남북한 내부의 관계라는 의미다. 특혜관세 부여 대상을 ‘모든 역외(域外)가공지역’으로 해 우리가 북한 어디에서나 제조한 상품을 한국산으로 인정받을 여지를 만들어 놓았다.”
김 전 본부장은 WTO 수석변호사 출신이다. 뜨거운 세계 통상현안을 다뤄본 감각을 살려 협정문 단어 하나하나에 의미를 집어넣었다. 김 전 본부장이 정부에서 일하기 시작할 무렵 WTO 회원국 150개국 가운데 한국은 몽골과 함께 FTA가 전혀 없는 나라였다. 불과 8년 후 한국은 FTA 우등생이 됐다. 김 전 본부장의 ‘동시다발적 FTA 전략’의 성과다. 하지만 경쟁국이 계속 잠만 자지는 않을 것이다.
―일본 미국 등의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은 성공적일까. 중국은 구경만 할까.
“미국은 2015년까지 관세 철폐를 목표로 하고 있다. 일본이 베트남의 농수산물 시장 개방 요구에 어떻게 대응할지 관심거리다. 우리도 TPP 협상에 참여하되 타결을 서두르지는 않는 것이 좋을 것 같다. 미국 일본 등 해양세력이 뭉치는 데 대항해, 나라면 중국에 한국 대만 홍콩 마카오 몽골 아세안까지 묶는 FTA를 추진하라고 권유하겠다. 이런 제안이 오면 우리도 적극 검토할 필요가 있다. 미국과 중국의 패권 쟁탈전이 벌어지면 우리는 양측으로부터 몸값을 올릴 수 있다.”
김 전 본부장은 패권국 간 흥정에 따라 우리 운명이 결정된 뼈아픈 역사를 거론했다. 고종은 일본이 1905년 가쓰라-태프트 밀약과 제2차 영일동맹으로 미국과 영국으로부터 각각 한국 지배를 인정받은 사실을 모른 채 외국 열강에 한국 독립에 대한 지원을 ‘눈물로 호소’했다. 이런 역사가 되풀이돼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는 “부시 대통령이 백악관 만찬에서 ‘미국과 중국은 생각보다 가까운 관계’라고 말한 적이 있다”며 “패권국 간 갈등도 있지만 은밀히 통하는 게 많다는 점에 유념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외교관이던 부친(김병연 전 노르웨이 주재 대사)을 따라 어려서부터 외국생활을 오래 한 그는 2003년 노무현 정부에 참여하면서 거의 매일 역사책을 읽었다.
―한국의 다음 FTA 전략은 어때야 하나.
“FTA를 맺은 45개국을 거미줄처럼 엮는 RTA, 즉 ‘지역 FTA’를 해야 한다. 예를 들어 한국 EU 아세안을 RTA로 묶어 동남아에 진출한 한국기업이 현지 부품을 사용해 만든 제품을 EU에 무관세로 수출하는 식이다. 러시아가 카자흐스탄 우크라이나 등 8개 국가와 체결한 유라시아경제공동체라는 RTA에도 가입해야 한다.”
그는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면 후퇴하는 것”이라며 김훈의 소설 ‘칼의 노래’에 나오는 이순신 장군의 말을 인용했다. ‘바다에서 나의 위치는 늘 적과 맞물려 돌아갔다. 내가 함대를 포구에 정박시키고 있을 때도, 적의 함대가 이동하면 잠든 나의 함대는 저절로 이동한 셈이었다.’ FTA, RTA 전쟁에서 우리가 가만히 있어도 경쟁국이 달라지면 우리의 상대적 위치도 달라져 버린다는 것이다.
―남북한 FTA도 가능한가.
“2007년에 노 대통령에게 남북한 FTA를 통해 세계적으로 관세부과 등에 쓰는 HS코드와 원산지 규정 등 국제 규범을 북한이 도입하도록 유도하는 방안을 보고했다. 서울에서 북한을 통과해 중국과 러시아 국경까지 10차로 고속도로 건설 프로젝트를 남북 FTA에 포함시킬 수 있다. 북한은 차량 통행료를 받게 된다. 북한 주민은 고속도로를 달리는 현대·기아차를 보면서 바깥세상을 더 알게 될 것이고 한국의 젊은이들은 육로로 중국 러시아로 여행할 수 있어 섬나라 같은 고립감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고속도로 공사비는 북한에 많이 매장된 마그네슘 철광석 우라늄으로 받을 수 있다. 노 전 대통령이 평양에서 남북 FTA를 제안하자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FTA를 들어봤지만 준비가 안 돼 있으니 다음에 논의하자’고 대답했다.”
그에게 청년들에게 들려줄 말을 부탁했다. “준비하고 도전하라. 기회는 꼬리가 없어 뒤에서 잡을 수 없다.”
홍권희 논설위원 koniho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