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할린에 두고온 자식들 눈에 아른거려…”
“난 너 못 버려, 죽어서도 못 버려. 엄마니까, 내가 엄마니까….”
여배우의 외침에 두 손을 모으며 무대를 응시하던 강정순 할머니(80)의 눈시울도 붉어졌다. 듣기만 해도 가슴 먹먹해지는 그 이름, 어머니다.
18일 오후 인천 연수구 연수동 사할린동포복지회관. 인천 부평아트센터 상주극단 ‘십년 후’의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름, 어머니’가 작은 식당무대에 애틋한 어머니의 사랑을 펼쳐냈다.
막이 오르자 병동이 무대로 펼쳐졌다. 치매에 걸린 할머니가 등장했다. 주치의는 그의 아들이었다. 어릴 적 친엄마가 아니란 걸 알고 집을 나간 뒤 첫 만남이었다. 어머니는 다시 만난 아들을 ‘오라버니’라고 불렀다. 치매 탓에 알아보지 못한 것이다. “어이구, 어쩌누” 어르신들의 탄식이 절로 흘렀다. 참회한 아들은 절규했지만 어머니는 끝내 아들의 마음을 받아주지 못하고 영정 속에 웃음을 남긴 채 생을 달리했다.
극단 ‘십년 후’의 배우들이 18일 인천 사할린동포회관에서 가족들의 즐거운 한때를 연상케 하는 장면을 연출하고 있다. 인천=서영수 전문기자 kuki@donga.com
“왜 방송을 안 해?” 깜박 잠드는 바람에 뒤늦게 극장에 나타난 최고령 김옥동 할아버지(95)의 말은 때아닌 웃음을 줬다. 회관 공연을 매번 본다는 그는 젊은 시절 일본 탄광에서 지낸 시간이 가장 고통스러운 기억으로 남아 있다고 했다. “월급은 손에 쥐어보지 못했소. 그 고생은 100년이 지나도 잊을 수 없을 거요.” 김 할아버지는 귀국을 말리던 아들의 모습이 지금도 눈에 밟힌다며 한숨을 쉬었다.
전북 부안이 고향인 장병술 할아버지(86)는 1945년 1월 사할린으로 끌려갔지만 그해 8월 뱃길이 끊기고 말았다. 부인과 큰딸, 아들을 가슴에 묻은 뒤 갖은 고생을 하고 53년이 지나 한국으로 돌아왔다. 그는 “일본이 1950년대까지 일본인들은 모두 불러들였지만 조선 사람들은 찾지 않았다”며 목청을 높였다. 얼마 전 사할린을 다녀오기도 했지만 요즘 들어 혈육이 더 그리워진다고 했다. “재밌는 공연도 있고 이곳 생활이 편하다지만 나는 늙어만 가고 이러다 자식도 못 보고 눈감게 생겼는데 참….”
▼ “문화 오지 찾아 ‘신명’나게 한판 벌였어요” ▼
전통타악연구소 단원들이 지난달 26일 전남 완도군 노화도에서 공연하는 모습.
전통타악연구소(소장 방승환) 단원 12명이 한 달여 동안 전국 곳곳에 신명을 심어줬다. 지난달 6일 전남 나주 공산5일장을 필두로 이달 12일 동아일보 주최의 강원 정선 하이원 에코투어까지 30여 차례다.
이들이 한 달 넘게 나눔공연에 나선 것은 1996년 창단 이래 처음. 맏언니 김정희 씨는 “이동거리도 길고 하루 2회 공연 일정이 벅차기도 했지만 매번 관객과 무대가 달라 새로웠다”고 했다.
무력감에 빠져 고민하다 공연을 보고 활력을 찾았다는 전남 완도군 노화도의 한 20대 교사는 “가슴이 뻥 뚫렸다”며 전통타악연구소에 감사 편지를 보내왔다. 강원 영월군 탄광문화촌에선 비를 아랑곳하지 않은 관객들과 빗속의 신명을 펼쳤다.
박길명 나눔예술특별기고가 myu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