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자랑스럽습니다
《한국무역협회가 30일 서울 강남구 삼성동 무역센터에서 무역 1조 달러 클럽 가입을 기념하는 에세이와 손수제작물(UCC) 공모전 시상식을 열었다. 500여 명의 응모자 가운데 최우수상 3명, 우수상과 장려상 각 8명이 수상자로 결정됐다. 주부 우수상을 받은 문장옥 씨(59)와 중고등부 최우수상을 수상한 최지영 양(16)의 사례를 재구성해 소개한다.》
■ ‘맨땅에 헤딩하기가 특기’인 남편에게 아내가
“걱정 말래도. 지금 다 잘돼 가요.”
1994년 그날이 기억나네요. 일본으로 출장을 떠난 당신이 전화를 걸어왔습니다. 무사히 도착해 바이어와 협상이 잘 끝났다는 낭보였지요. ‘이 가여운 사람을 어쩌면 좋을까….’ 눈물이 나는 걸 꾹 참고 겨우 통화를 마쳤습니다. 나도 참 주책이네요.
‘맨땅에 헤딩하듯’ 바이어를 만나겠다고 일본 도쿄를 찾아간 당신. 전철역 뒷골목 제일 싼 여인숙을 물어물어 찾아다니고, 주머니 사정이 여의치 않아 바나나 한 개로 하루를 버텼던 당신 속사정을 아내인 내가 모를까 봐요?
“회사 그만두고 우리 중소기업이 만든 TV 브라운관 해외에 팔아주는 일 하려고.” 작은 수출중개회사를 차리겠다는 폭탄선언이었습니다. 그래도 대기업에서 부장까지 했던 당신이기에 한결 쉬울 거라 생각했습니다. 콧대 높은 바이어들이 당신을 만나주지도 않고 찬밥 취급할 줄 알았더라면 도시락을 싸들고 다니면서 말렸을 텐데 말이에요.
가만히 있어도 땀이 줄줄 흐르던 날, 바이어를 만나기 위해 넥타이, 정장에 땀을 뻘뻘 흘리던 당신 모습이 생각나요. 한 손에는 샘플이 든 여행가방, 다른 손에는 서류가방을 들고 다니던 당신의 축 처진 어깨를 떠올리면 지금도 마음이 먹먹해요. “여보, 내가 도울 일이 있으면 말해요. 힘닿는 데까지 해볼 테니.” 이 말이 내가 해줄 수 있는 전부였지요.
사업을 시작한 지 며칠 지난 후였습니다. ‘딩동!’ 초인종 소리에 가슴이 콩닥거렸습니다. 1시간 전 당신은 “바이어를 접대해야 하는데 숙박비, 식사비가 만만치 않아. 집에 데려갈 테니 부탁한다”고 일방적으로 ‘통보’했지요. 현관문 앞 헌칠한 키의 구릿빛 피부 인도인을 본 당신의 어머니는 그 길로 방에 가 숨었잖아요. 아이들은 무슨 일인가 싶어 두 눈이 휘둥그레졌고요. 기억나죠? 우리의 첫 손님, 인도 바이어였어요. 잡채를 만들고 온갖 종류 김치를 썰어 놓고 상다리가 휘어지도록 음식을 차렸지요. 안방까지 내줘 가며 인도 바이어를 먹이고 재워 보냈습니다.
며칠이나 지났을까요. “바이어가 30만 달러나 하는 중고 설비를 한 푼도 안 깎고 냉큼 사가겠다지 뭐야. 내가 ‘네고(협상)는 안 하냐’고 되레 물었다니까.” 당신이 모처럼 환한 얼굴로 귀가해 싱글벙글 이야기를 털어놓는데 어찌나 기분이 좋던지….
그날부터 당신은 20년 동안 중국, 일본, 인도 등 국적을 넘나드는 외국 바이어를 100명 넘게 집으로 초대했어요. 일본인 고노 씨는 특히 기억이 나요. 처음엔 혼자 왔는데 결혼한 뒤에는 부인을, 나중에는 아기까지 데려왔거든요. 가끔은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원망스럽기도 하지만 우리 회사가 쑥쑥 커가는 걸 보면, 그리고 당신이 뿌듯해하는 걸 보면 그런 마음은 깨끗이 사라집니다.
요즘 무역 1조 달러를 앞두고 세상이 떠들썩해요. 지금은 당신도 은퇴했지만 괜히 어깨가 으쓱해지죠. 어쩌면 당신은 그 큰 산의 일부에 지나지 않겠지만 그래도 아시죠? 내겐 당신이 일등 공신이라는 걸요.
■ 입학-졸업식 한번 못 챙겨준 아빠에게 딸이
올해 9월, 부산항에 나간 아빠가 문자메시지를 보냈습니다. ‘지영아 이것 봐라. 아빠가 중국에 보내는 물건이다.’ 큰 컨테이너 안에 상자가 차곡차곡 쌓여 있는 모습이었습니다. 중국으로 수출할 한방 화장품을 선적하던 날, 아빠가 찍어 보낸 사진이었어요.
1년 전 중학교 졸업식이 생각나요. 아빠는 초등학교 졸업식, 중학교 입학식에도 안 오셨는데 그날도 마찬가지였잖아요. 아빠는 그때 번듯한 대기업을 박차고 나와 하나코퍼레이션이라는 낯선 회사를 차렸지요. 사실 그게 힘든 길이었는지도 몰랐어요. 중국, 일본, 인도로 출장을 가시면 ‘아빠는 여행을 참 좋아하나 보다’ 하고 철없이 생각했어요.
“지영아, 아빠가 중국에 한방 화장품을 팔아 볼까 한다.”
“어휴, 아빠, 중국 사람들이 우리나라 화장품을 쓰겠어요?”
화장품 하나 수출하려면 온갖 허가를 받아야 하는 탓에 1년 동안 서류작업에 매달리느라 잠도 못 자며 일하는 아빠를 보면서 ‘도대체 수출이 뭐기에’ 하는 답답한 마음이 들었던 것도 사실이에요.
졸업식 날도 아빠는 한방 화장품 리콜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부랴부랴 홍콩으로 떠났지요. 2억 원어치 물건을 팔았지만 용기가 새 고스란히 물건 값을 물어줘야 했던 아빠를 생각하면 지금도 마음이 아파요. “꼭 선물 사오세요”라는 투정에 웃어주던 아빠 모습이 떠올라요. 이젠 아빠가 직접 만든 한방 화장품이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등지로 수출되고 있어요.
신문에서, TV에서 바닷가를 낀 항구의 수출현장을 접할 때면 뿌듯합니다. 아빠가 만든 화장품도 저 큰 배에 실려 바다를 누빌 테니까요. 그날 제가 보냈던 문자메시지 답장 기억하세요? ‘아빠는 나의 영웅이에요.’
장선희 기자 sun10@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