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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파원 칼럼/최영해]美-日“법관의 입은 개인의 입 아니다”

입력 | 2011-12-01 03:00:00


최영해 워싱턴 특파원

“현명하고 경험 많은 라틴계 여성이 때로는 백인 남성보다 더 나은 판단을 내릴 수 있다.”

얼핏 듣기에 평범한 것 같은 이 한마디가 2009년 봄여름 미국을 달궜다. 이 발언은 그해 5월 히스패닉계 여성으로는 처음으로 대법관 후보로 지명된 소니아 소토마요르 판사가 2001년 대학 강연에서 한 말이었다.

주요 언론과 야당 의원들은 발언의 적절성을 놓고 소토마요르 판사를 집요하게 검증하고 추궁했다. “소토마요르 판사가 자신의 이념과 도덕적 가치관을 판결에 이입할 소지가 있는 인물 아니냐”는 게 검증의 핵심이었다.

8월 6일 청문회가 끝날 때까지 수개월 동안 소토마요르 판사는 자신이 감성에 휘둘리지 않는 이성적인 인간임을 강조하는 데 수많은 시간을 할애해야 했다. 문제가 된 발언에 대해선 “단어 선택이 부적절했다. 당시 나의 말은 소수인종 출신의 법대생에게 용기를 고취하려고 한 것이었다”고 해명했다. 또 “법관은 오로지 법 조항만을 따라야 한다. 주관이나 이념을 개입시켜서는 안 된다”며 “판결을 내리게 하는 것은 마음이 아니라 바로 법”이라고 거듭 강조했다.

8년 전의 별것 아닌 것 같은 발언 하나를 놓고 이뤄진 수개월간의 혹독한 검증은 선진국에서 법관이 판결에 자신의 이념이나 주관을 개입시킬 소지에 대해 얼마나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는지를 보여주는 사례다.

미국 최초의 여성대법관이었던 샌드라 데이 오코너 전 대법관은 2009년 동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대법관이 될 때 ‘나는 미국의 헌법을 수호하고 지키는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능력이 닿는 한 최고의 노력을 다하겠다’고 엄숙히 선서했다”며 “이 정신이야말로 평생 법조인으로 살면서 수많은 판결과 결정을 내릴 때 지키고자 했던 최고의 기준이었다”고 회고했다.

법관의 중립성, 법관은 오로지 헌법에 따라 판결한다는 것은 선진국 법치주의의 대원칙이다. 일본에서는 1998년 한 판사가 찬반 논쟁이 일고 있는 법안에 대해 공개석상에서 반대 의견을 표명했다가 사회문제가 된 적이 있다. 당시 일본 최고재판소(한국의 대법원)는 이 판사에게 중징계를 내렸다. 이후 일본 법조계에는 정치적으로 해석될 수 있는 발언을 자제하는 분위기가 정착됐다. 법관의 양심이 개인의 표현의 자유보다는 우선하는 것이다.

그처럼 법관 스스로 삼가야 하는 발언 무대의 범위에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가 포함되는지를 놓고 한국에서 요즘 논란이 분분하지만 미국에서는 2008년부터 법조인들의 SNS 사용에 대한 윤리적 기준을 만들어야 한다는 논의가 활발하게 진행돼 왔다. 뉴욕 주 법조윤리자문위원회는 2009년 1월 SNS 가이드라인을 만들어 자율권고 사항으로 법조인들이 SNS를 사용할 때에도 뉴욕법조인윤리강령에 명시한 원칙을 그대로 지켜야 한다고 밝혔다. 윤리강령에는 ‘법조인들은 언제나 불편부당성과 진실성에 대한 공공의 신뢰가 증대되는 방식으로 행동해야 한다’고 규정돼 있다.

뉴욕의 한 법조인은 올 1월 “시사적인 문제에 대해서 블로그에 계속 글을 올려도 되느냐”고 법조윤리자문위에 물었고, 자문위는 “SNS 가이드라인은 블로그에도 그대로 적용된다”고 답변했다.

미국이나 일본의 법관인들, 사회적 이슈에 대해 자기 의견이 없을까. 그럼에도 그들이 오로지 판결로만 말하는 것은 법관의 중립성, 신뢰가 민주주의의 근간이라는 자부심과 사명감 때문일 것이다.

최영해 워싱턴 특파원 yhchoi65@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