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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화문에서/조성식]분노가 떠다니는 거리에서

입력 | 2011-12-01 03:00:00


조성식 신동아팀 차장

아파트촌의 밤거리는 쓸쓸했다. 우리는 빈 상가건물 1층에서 플라스틱 간이의자에 앉아 얘기를 시작했다. 식료품 가게를 운영하는 40대 중반의 사내는 그새 부쩍 늙은 것 같았다. 눈동자가 풀려 있었고, 목소리는 메마르고 낮았다. 막막한 어둠이 그의 뒤편에 도사리고 있었다. 한 달 전 주민들에게 탄원에 동참해달라고 호소할 때 그는 맹수처럼 울부짖었다. 내 딸을 성폭행한 아이들을 처벌해달라고.

또래 중학생들에게 집단 성추행과 성폭행을 당했던 그의 외동딸은 며칠 전 퇴원했다. 그간 몇 차례 자살 시도가 있었다. 한 달 넘게 입원해 치료를 받았지만 정상으로 돌아오기란 애초 기대하기 어려운 일이었는지 모른다. 사내는 딸을 외국으로 보낼 준비를 하고 있다며 한숨을 내쉬었다. 등교는 고사하고 길거리를 돌아다니지도 못한다니.

지난달 알려진 서울 은평구 여중생 집단 성폭력 사건이 유난히 관심을 끈 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관련자들이 고작 중학교 1학년이라는 점. 둘째, 가해 학생들이 만 14세 미만이라 형사처벌을 받지 않는다는 점. 셋째, 피해자는 등교할 엄두를 못 내는데 가해자는 버젓이 학교에 다닌다는 사실이었다. 학교가 할 수 있는 가장 큰 징계가 ‘등교정지 10일’이었다. 피해 학생의 부모는 가해 학생들의 처벌을 촉구하는 탄원서를 작성했고, 4000명의 주민이 이에 서명했다.

후속 취재를 해보니 몇 가지 새로운 사실이 드러났다. 경찰이 본격적으로 수사에 착수해 가해 학생들을 모두 가정법원으로 송치했다. 관련자는 6명에서 16명으로 늘었다. 그들은 세 학교에 분포돼 있다. 피해 여학생이 소속된 학교는 사건에 연루된 학생 전원을 전학시켰다.

가정법원은 가해 학생들에 대해 보호자 관리나 보호관찰, 수강명령(성폭력 교육) 등 보호처분 결정을 내릴 것으로 보인다. 교육은 여성가족부에서 맡고 있다. 여성부 관계자에 따르면 중학생 범죄율이 높아지는 추세인데, 이번 사건과 같은 또래 성폭력이 늘고 있다고 한다. 경찰청 통계를 보면 지난해 성폭력을 행사한 청소년은 2452명. 그중 중학생 이하에 해당하는 만 15세 미만이 27%인 670명이다. 서울시교육청 관계자는 “학교에서 감추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실제로는 더 많을 것”이라고 말했다.

피해 여학생은 4월부터 9월까지 6개월간 거의 매일 두들겨 맞고, 40여 차례 성폭행을 당했다. 가해 학생들은 성폭행 광경을 휴대전화 동영상에 담아 피해 학생을 옭아맸다. 구타는 교실, 복도, 계단 등 공개된 장소에서 벌어졌다. 6월경 딸의 교복이 찢어지고 옷에 발자국이 찍힌 걸 발견한 부모가 조사를 부탁했지만, 학교 관계자는 “아이가 밝아서 학교생활 잘하고 있으니 걱정 말라”고 했다. 학교 측은 소문 속의 휴대전화 동영상을 확인하고 나서 경찰에 수사를 요청했다. 동료 학생들의 방관도 한몫했다. 피해 학생이 끌려다니며 맞는 걸 봤지만 누구도 도와주지 않았고 누구도 교사에게 알리지 않았다.

지친 표정의 사내가 넋두리처럼 내뱉었다. “다 때려죽이고 싶은 맘이 왜 안….” 그의 목소리가 떨렸다. “그 아이들 얼굴도 몰라요. 모르는 게, 안 보는 게 낫지….” 어린 딸의 영혼을 도난당한 그는 분노할 기운마저 잃어버린 듯했다. 어쩌면 분노가 자신과 가족을 구원하지 못한다는 데 절망한 건지도 모르겠다.

조성식 신동아팀 차장 mairso2@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