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10일 서울 광진구 광장동 악스코리아에서 열린 샤넬의 2011∼2012 크루즈 컬렉션에 등장한 영국의 톱 모델 스텔라 테넌트. 샤넬 제공
시즌에 민감한 패션계에도 그 변화가 감지되고 있다.
여름철 패션 아이템의 대명사인 선글라스가 이제는 봄·가을의 강한 햇살을 견디기 위해 필요해졌을 뿐만 아니라 한겨울에도 따뜻한 곳을 찾아 떠나는 이들의 공항패션에서 없어서는 안 될 절대지존이 됐다. 쉽게 걸치고 벗기 편하게 겉옷은 경량화됐고 안에 입는 셔츠나 톱은 얇아졌지만 그 기능성은 더욱 향상됐다. 근래 들어 큰 인기를 끌었던 패딩 재킷은 더욱 촘촘하게 누빔 처리가 됐어도 입은 듯 안 입은 듯 가벼워졌고 아웃도어 패션의 소재들은 피부가 숨을 쉬듯 몸 안의 열기는 간직한 채 습기는 밖으로 배출하는 등 예측 불가능한 기후에 그나마 대비할 수 있는 여지를 마련해줬다.
한국에서도 많은 글로벌 브랜드가 리조트 컬렉션 또는 크루즈 컬렉션을 선보였다. 원래 19세기 말, 20세기 초 디자이너들이 겨울철 추위를 피해 따뜻한 지중해로 크루즈 여행을 떠나는 소수의 상류층 고객에게 그들이 배 안에서, 그리고 도착 후 휴양지에서 즐길 여러 의상으로 데이타임용 캐주얼웨어, 칵테일드레스, 이브닝드레스 등을 제작해줬던 것에서 유래한 것인데 이제 간절기를 위한 색다른 재미를 주는 미니 컬렉션으로 재탄생한 것이다.
필자도 몇 주 전 샤넬의 크루즈 컬렉션에 초청돼 그 재미에 흠뻑 빠질 기회가 있었다. 컬렉션의 제작 스태프이며 무대, 조명, 관객이 앉는 스툴 하나까지도 파리에서 공수해왔고 스텔라 테넌트를 비롯한 슈퍼모델들이 직접 런웨이에 등장해 그 완성도와 수준은 어느 것 하나 흠 잡을 데가 없었다.
하지만 그런 외형적인 화려함보다 더 매력적인 것은 컬렉션 내내 양쪽 벽면에 비친, 마치 크루즈를 타고 경치를 감상하듯 흐르는 영상들이었다. 흡사 킬리만자로 산 꼭대기에 녹지 않은 만년설을 연상시키는 설산, 습한 지중해의 우거진 올리브나무 그림자들 그리고 보름달이 뜬 가든테라스…. 그 영상 안에는 이야기가 있고, 낭만이 있고 변화하는 날씨를 즐기는 지혜가 있었다. 이미 거의 백 년 전의 날씨를 탓하기 전에 바뀐 날씨를 패션을 통해 즐기려는 지혜가 있었던 것이다. 변덕스러운 날씨가 패션의 패러다임을 바꾸고 있지만 패션은 늘 즐기는 것임을 잊지 말자. 그래서 봄에 입는 시폰 블라우스가 상큼해 보이고 겨울에 입는 터틀넥 스웨터가 따뜻해 보이는 것이다.
패션디자이너·홍익대 섬유미술패션디자인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