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제 수산리∼어론리 자작나무 숲길
자작나무는 겨울 숲을 지키는 ‘하얀 정령들’이다. 희부연 알몸으로 떼 지어 북풍한설을 막아낸다. 얼마나 추울까. 잔가시 많은 흰 생선뼈처럼 산비탈에 몸을 꼿꼿이 세우고 있다. 영락없는 ‘가는 선으로 그린’ 펜화이다. 참빗살처럼 촘촘한 인제 수산리 자작나무 숲. 시베리아 자작나무들만큼 육감적이진 않지만, 그래서 더욱 애틋하다. 여리여리하고 날씬한 나무들이 마치 수줍은 소녀 같다. 칼바람이 불 때마다 가늘게 몸을 떤다. 어쩌다 비치는 석양의 비낀 햇살엔 우우우 몸을 풀며 언 몸을 녹인다. 펑펑 눈이불이라도 쏟아져야 비로소 발을 뻗고 잔다. 인제=서영수 전문기자 kuki@donga.com
거기에다 자작나무를 걸어가게 한다면
자작나무의 눈을 닮고
자작나무의 귀를 닮은
아이를 낳으리
봄이 오면 이마 위로
새순 소록소록 돋고
가을이면 겨드랑이 아래로
가랑잎 우수수 지리
그런데 만약에
저 숲을 이룬 자작나무를 베어내고
거기에다가 인간을 한 그루씩 옮겨 심는다면
지구가, 푸른 지구가 온통
공동묘지 되고 말겠지
―안도현의 ‘자작나무의 입장을 옹호하는 노래’ 전문》
겨울 자작나무는 희부연 알몸으로 떼 지어 서 있다. 늘 북풍한설의 최전선에 자리 잡는다. 쌩! 쌩! 칼바람에 몸이 아리다. 수십 수백만 그루가 집단 퍼포먼스를 한다. 꼿꼿하지만 여리다. 가녀린 나무들이 한데 모여 거대한 백색공화국을 만든다. 찬바람이 불면 가늘게 몸을 떤다. 생선 하얀 잔가시가 비탈에 무수히 박혀 있는 것 같다. 눈부신 옥양목 맨살 드러낸 채 ‘얼음 숲’을 밝힌다. 가끔 촘촘한 ‘참빗 가슴뼈’ 틈새로 햇살이 비스듬히 비친다.
김운기 인제군 산림녹지계장(49)은 “당시 고급펄프로 쓰려고 1평에 한 그루씩 모두 180만여 그루를 심었습니다. 그중 60%만 살았다고 해도 100만 그루가 넘는다고 봐야죠. 겨울 자작나무 숲도 아름답지만 초봄 여린 풀빛의 자작나무 숲도 일품입니다”라고 말한다.
심성흠 수산리 마을이장(56)은 “응봉산(해발 800.3m)은 모두 열두 골짜기나 됩니다. 옛날에는 절이 많아 절골로 불리는 곳도 있지만, 지금은 그 골짜기마다 자작나무가 빼곡합니다. 한때 사진작가들이 많이 찾았는데, 요즘엔 관광버스 단체여행객들도 오신다”고 말한다.
수산리 자작나무 숲은 소녀티가 물씬 난다. 아직 여리고 가냘프다. 수줍음을 탄다. 목이 긴 하얀 사슴 같다. 멀리서 보면 영락없는 펜화다. ‘하얗고 긴 종아리가 슬픈 여자(최창균 시인)’ 닮았다. 그래서 더욱 애틋하다. ‘자작나무 숲의 벗은 몸들이/이 세상을 정직하게 한다 그렇구나 겨울나무들만이 타락을 모른다(고은 시인).’
수산리 자작나무 숲은 응봉산 자락에 있다. 수산리∼어론리 19km 임도를 따라 걷는 게 최고다. 느릿느릿 걸어도 6시간 정도면 충분하다. 임도는 해발 450∼580m에 걸쳐 있다. 대체로 평탄하지만 겨울철 승용차 드라이브는 무리다. 먹고 마실 것과 아이젠을 준비하는 것은 필수다.
어론리 임도 입구 표지석. 이 길을 따라가면 수산리가 나온다.(위) 자작나무 숲 호젓한 임도. ‘함박눈 트레킹’으로 안성맞춤이다.(아래)
1938년 4월 18일 시인 오장환(1918∼1951)은 일본의 한 온천에서 선배 이육사 시인(1904∼1944)에게 엽서를 보냈다. 그것은 귀한 엽서였다. 다름 아닌 자작나무 껍질을 씌워 만들었던 것. 오장환은 말을 아꼈다. 단 3줄의 문장으로 대신했다. 마음을 이미 그 엽서에 모두 담았던 것이다. ‘백화껍질이요. 이곳은 나무가 만소. 동무들에게 소식 전해 주시오.’ 백화(白樺)는 한자어로 자작나무를 뜻한다. 오장환은 다짜고짜 ‘자작나무 껍질 엽서’인 것부터 뽐냈다. 그가 바로 순진무구한 ‘자작나무 소년’이었던 것이다.
―정끝별의 ‘자작나무 내 인생’에서.
mars@donga.com ▼‘자작나무 천마도’ 무덤 주인은 북방 기마민족 후예?▼
자작나무 껍질을 여러 겹 붙인 뒤, 그 위에 그린 천마도. 동아일보DB
문제는 그 그림이 자작나무 껍질 위에 그려졌다는 것이다. 도대체 5∼6세기(추정) 경주에서 자작나무 껍질을 어떻게 구했을까. 어떻게 1500여 년 동안이나 썩지 않았을까. 그림판은 자작나무 껍질을 무려 47겹이나 덧붙였다. 잠자리나 매미 날개를 수십 겹 붙여 놓았다고나 할까. 그러려면 최소 50년이 넘는 자작나무 껍질을 벗겨야 가능하다. 도대체 어디서 구했을까. 그리고 왜 하필 자작나무 껍질인가. 자작나무 유물은 천마도뿐만이 아니었다. 임금의 모자인 듯한 ‘세모꼴 자작나무 껍질 모자’도 있었다.
자작나무는 북위 45도 위쪽 추운 지방에서 잘 자란다. 기름기가 많아 탈 때 ‘자작자작’ 소리 낸다고 해서 자작나무다. 우리나라에선 백두산 개마고원 일대(북위 42도)에 빽빽하다. 백두산 일대에서 자라는 자작나무는 대부분 사스래나무다. 껍질은 시베리아 자작나무와 같이 하얗고 종이처럼 얇게 벗겨진다. 하지만 껍질이 매끈하지 않고 거칠다. 곧지 않고 약간 구불구불하게 자란다. 경주는 북위 35.8도에 불과하다. 아예 자작나무가 자랄 수 없다.
학자들은 그 무덤의 주인공이 북방 기마민족의 후예임이 틀림없다고 말한다. 북방 유목민들은 자작나무를 ‘하늘로 가는 사다리’라고 생각했다. ‘우주목(宇宙木)’이라며 떠받들었다. ‘천마가 죽은 이의 영혼을 하늘로 실어 나른다’면 자작나무는 그 영혼이 숨쉬는 곳인 셈이다. 어느 학자는 천마총이 적석목곽분이라는 점을 들어 그 주인공이 흉노족일지도 모른다고 말한다. 적석목곽분은 기원전 4세기∼기원전 2세기 중앙아시아 흉노족의 고유 무덤 양식이라는 것이다.
‘산골집은 대들보도 기둥도 문살도 자작나무다/밤이면 캥캥 여우가 우는 산(山)도 자작나무다/그 맛있는 메밀국수를 삶는 장작도 자작나무다/그리고 감로(甘露)같이 단샘이 솟는 박우물도 자작나무다/산 너머는 평안도 땅도 보인다는 이 산골은 온통 자작나무다’(백석의 ‘백화 白樺’).
그렇다. 옛 개마고원 사람들은 자작나무 기둥으로 움막을 짓고, 자작나무 껍질로 지붕을 얹었다. 자작나무 장작으로 밥을 짓고 군불을 땠다. 깜깜한 밤중엔 자작나무 횃불로 길을 밝혔다. 산삼을 캐면 자작나무 껍질에 싸서 고이 보관했다. 여름날 밥이 쉬지 않도록 자작나무 껍질에 갈무리했다. 그리고 마침내 숨을 거두면 자작나무 껍질에 시신이 싸여 땅에 묻혔다.
러시아 사람들은 귀한 손님에게 자작나무 껍질로 만든 명함을 내민다. 시베리아 사람들은 지금도 자작나무 집에서 산다. 자작나무에서 사는 차가버섯 차를 마시고 자작나무로 페치카를 달군다. 자작나무 껍질에 그림을 그리고 글씨를 쓴다. 그러다가 죽으면 자작나무 껍질 옷을 입고 묻힌다. 알타이 무당들은 자작나무 껍질로 ‘하늘의 별을 담는 주머니’를 만들었다. 금은 싸라기별을 자작나무 망태에 담았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