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칠고 소화 안돼 한때 천대…이젠 최고 건강식으로
몸에 좋은 약이 쓰다는 말처럼 현미밥은 거칠고 소화하기 힘든 것이 단점이다. 이 때문에 얼마 전까지만 해도 가난의 상징이었고 구박덩어리였다. 역사적으로 현미밥으로 인해 가장 핍박을 받았던 인물이 유교에서 주자(朱子)로 받드는 남송 때의 대학자 주희(朱熹)다.
주자가 유명해지니 사방에서 가르침을 받겠다는 사람들이 찾아 왔는데 그중에 호굉이라는 자도 있었다. 주자는 자신을 찾는 사람에게 언제나 현미밥을 대접했으니 호굉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러자 호굉이 “아무리 산중이라고 하더라도 먼 데서 온 손님에게 어찌 한 마리 닭과 한잔 술이 없을 것이냐”며 불쾌한 기색을 보이고는 이튿날 작별인사도 없이 떠났다.
말년에 박해를 당하자 평소 주자를 따르던 사람들도 주자의 집 앞을 지나면서 들르지 않았고 오히려 주자의 제자였다는 사실이 발각될까 봐 변장하고 다녔다니 세상의 험악함이 이와 같다고 이익은 ‘성호사설(星湖僿說)’에서 한탄했다. 호굉에게 심한 핍박을 받았던 주자는 결국 귀양을 가서 죽는다. ‘송사(宋史)’ 호굉열전에 나오는 이야기다.
현미밥을 대접받고는 무시당했다며 원한을 품은 호굉의 인물 됨됨이도 그렇지만 당시에 현미밥이 얼마나 형편없는 식사였는지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800년이 지난 지금은 현미밥이 최고의 건강식으로 꼽히고 있으니 호굉이 다시 살아난다면 어떤 반응을 보일지 궁금하다.
재상이 되었어도 사람들이 먹기 싫어하는 현미밥을 먹었던 인물도 있다. 한 무제 때의 재상 공손홍(公孫弘)으로 대기만성의 표본으로 꼽히는 사람이다. 공손홍은 어렸을 때 무척 가난했기 때문에 공부를 제대로 하지 못했다. 그래서 고향에서 감옥을 지키는 간수가 됐지만 일자무식이었기 때문에 실수를 저질러 그 자리에서 해임됐다. 공부를 해야겠다고 결심한 공손홍은 마흔 살에 공부를 시작해 나이 육십에 박사가 되었고 이후 승진을 거듭해 결국 재상의 자리에 올랐다.
참고로 역사책에서 공손홍에 대한 평가는 다소 엇갈린다. 예컨대 조정회의에서 어떤 문제가 쟁점이 될 경우 장점과 단점을 동시에 지적하면서 황제가 스스로 결정을 내리도록 했다고 한다. 황제의 뜻을 최대한 반영한 유능한 참모라는 평가도 있지만 책임을 회피하는 참모였다는 평가도 함께 받는다.
<음식문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