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타자에다 퍼팅 실력까지 뛰어난 한국 프로골퍼 김대현(왼쪽). 그는 뛰어난 개인 기록을 가지고 있지만 우승 횟수가 많지 않은 것이 아쉽다. 반면 전성기 때의 타이거 우즈는 각 부문에서 선두는 아니었지만 압도적인 경기력을 뽐냈다. 동아일보 DB
▶이런 김대현도 올해 장타왕 타이틀은 천신만고 끝에 따냈다. 이진규라는 괴물 장타자가 등장했기 때문이다. 재밌는 것은 김대현이 막판에 장타왕을 줍다시피 했다는 점이다. 장타 순위에서 이진규에게 뒤진 2위였던 김대현은 PGA투어 퀄리파잉스쿨 예선에 참가하느라 시즌 최종전인 NH농협오픈에 불참했다. 그런데 이진규는 이 대회에서 비거리가 줄어 역전을 허용했다. 결국 김대현은 296.929야드를 기록해 이진규(296.875야드)를 0.054야드(약 4.9cm) 차로 제쳤다. 비거리 측정은 대회마다 2개 지정 홀에서 이틀에 걸쳐 이뤄지는데 12오버파로 부진해 컷오프된 이진규는 2개 홀에서 3번 우드를 잡아 평균 비거리가 줄었다.
▶평균 비거리나 타율, 평균자책, 슛 성공률처럼 퍼센티지를 따지는 순위는 이처럼 민감하다. 김대현과 이진규는 300야드를 쉽게 치는 장타자들이지만 5cm도 안 되는 거리 차로 희비가 엇갈렸다. 타율 같은 경우 1만분의 1인 1모(0.0001) 차로 타이틀 홀더가 결정되기도 한다. 그러다 보니 시즌 막판 아예 경기에 출전하지 않거나 상대 선수의 경기를 방해하는 등 추악한 꼼수 기록 관리가 나오기도 한다. 비난은 순간이지만 기록은 영원하다는 얘기는 이래서 나왔다.
▶기록 관리의 대표적인 사례는 프로야구 삼성 이만수의 타격 3관왕 등극이다. 1984년 홈런과 타점왕을 예약한 이만수는 2경기를 남겨놓고 타율 0.340으로 롯데 홍문종(0.339)의 거센 추격을 받았다. 마침 롯데와 2경기가 남은 삼성 김영덕 감독은 이만수를 출전시키지 않는 대신에 홍문종에게 9타석 연속 고의볼넷을 지시했다. 팀 간 승부에서도 2경기 모두 노골적인 져주기 경기를 해 OB 대신에 만만한 롯데를 한국시리즈 파트너로 선택했다. 그 결과는 독자 여러분이 더 잘 알 것이다. 이만수는 타격 3관왕을 차지하고도 정규 시즌 MVP가 되지 못한 유일한 선수가 됐고, 삼성은 최동원의 롯데에 3승 4패로 역전패해 2000년대 초반까지 이어진 혹독한 한국시리즈 징크스를 앓았다. 이런 걸 보면 기록도 영원하지만 비난도 영원하다는 생각이 든다.
▶김영덕 감독은 빙그레 시절인 1991년에도 이정훈의 타격왕 등극을 밀어줬다. 당시 롯데 선수였던 장효조는 막판 9타수 8안타를 몰아쳐 이정훈을 앞섰다. 그러나 곧이어 이정훈이 4타수 4안타를 쳐 재역전에 성공했고 남은 2경기를 빠졌다. 결국 이정훈은 타율 0.348로 마감해 장효조(0.347)를 1리 차로 제쳤다. 야구 룰의 허점을 이용한 기록 관리 사례도 있다. 김성근 감독은 1989년 태평양 시절, 경기를 크게 앞선 5회에 잘 던지던 선발 투수 최창호를 빼고 박정현을 구원 등판시켜 박정현에게 역대 신인왕 최다승인 19승을 만들어줬다. 선발 투수는 구원 투수보다 승리 요건이 훨씬 까다로워 무조건 5이닝 이상을 던져야 승리투수가 된다.
▶2009년 LG 김재박 감독은 ‘여우’라고 불리는 명성과는 영 딴판인 허술한 기록 관리로 오점을 남겼다. 각각 2경기와 1경기를 남기고 LG 박용택은 타율 0.374, 롯데 홍성흔은 0.372였다. 마침 두 팀의 맞대결. 김 감독은 박용택이 3타수 무안타가 되자 빼는 한편으로 투수에게 홍성흔을 상대로 4타석 연속 볼넷을 던지도록 지시했다. 25년 전 홍문종처럼 고의볼넷 판정은 받지 않았지만 홍성흔이 4타석에서 맞이한 공은 볼 16개에 스트라이크는 1개뿐이었다. LG는 마지막 타석에서야 정면 승부를 했고 1타수 무안타에 그친 홍성흔은 타율 0.371로 경기를 마감했다. 그런데 꼭 이럴 필요까지 있었을까. 당시 경기 전까지 홍성흔이 박용택을 역전하려면 3타수 2안타를 쳐도 0.0003이 모자랐다. 처음부터 정면 승부를 하면서 추이를 지켜봐도 충분했다. 결국 박용택만 남은 1경기에는 아예 결장해 평생 한 번 올까 말까 한 영광을 불명예스럽게 얻었다.
▶이에 비해 1990년 타격왕은 소수점 아래 다섯 자리인 사(0.00001)까지 따져 주인이 정해졌다. 하지만 극적인 역전극과 페어플레이로 팬들의 박수를 받았다. 빙그레 이강돈은 마지막 경기에서 4타수 2안타를 쳐 타율 0.33486으로 먼저 시즌을 끝냈다. 해태 한대화는 남은 2경기에서 5타수 4안타의 맹타를 휘둘러 0.33493을 기록해 1모도 안 되는 7사 차로 역전에 성공했다.
▶모든 팀이 똑같은 경기를 하는 프로 리그의 팀 승률과는 달리 개인 순위는 타석에 서거나 마운드에 오르는 횟수가 제각각이기 때문에 이처럼 순위의 왜곡 현상이 일어날 소지가 있다. 그래도 팀 스포츠에선 예를 들어 타자의 경우 정교함이든, 한 방이든, 수비든, 주루든 어느 한쪽만 잘해도 꼭 필요한 선수로 인정받을 수 있는 이점이 있다.
▶반면에 골프 같은 개인 스포츠는 종합적인 능력이 필요하다. ‘천재 소녀’로 각광받았던 미셸 위가 대단한 장타를 갖고도 나이가 들수록 ‘평범한 상위권 선수’로 전락한 것은 퍼트를 비롯한 쇼트게임 능력 부족 때문이다. 흔히들 “드라이버는 쇼이고, 퍼트가 돈이다”라고 하지만 ‘퍼트의 귀재’ 브래드 팩슨 역시 인상적인 활약은 하지 못한 채 만 50세가 돼 시니어 투어로 넘어갔다. ‘버디 퀸’ 박지은이 안니카 소렌스탐을 넘어설 수 없었던 것은 버디만큼 보기를 많이 했기 때문이다.
▶이에 비해 김대현은 장타자이지만 특이하게도 자기 평가에서 특기를 퍼팅이라고 썼다. 실제로 김대현은 올해 평균 비거리뿐만 아니라 퍼트 수에서도 1위에 올랐다. 야구로 치면 타격왕과 홈런왕을 동시에 차지한 셈이다. 그러나 이런 김대현도 2%가 부족하다. 그는 톱10 진입률까지 1위지만 정작 필요한 우승은 없었다. 꼭 필요할 때 한 방이 부족했던 탓이다. 반면에 전성기 때의 타이거 우즈는 각 부문에서 선두는 아니었지만 압도적인 경기력을 뽐냈다. 그 원동력은 다름 아닌 ‘창의성’이었다는 게 전문가들의 공통된 평가다. 수치로는 잡히지 않는 창의성. 數포츠도 그 궁극으로 가면 철학이 된다.
장환수 스포츠레저부장 zangpabo@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