靑과 대립해야 하는 與의 ‘역설’
“청와대가 당의 말을 너무 안 들어도 걱정이고 너무 잘 들어도 걱정이네….”
최근 한나라당 일부 의원 사이에서 이런 푸념이 돌기 시작했다. 한나라당 쇄신파와 친박(친박근혜)계에서 요구했던 민생예산 증액안을 이명박 대통령(MB)이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면서부터다. 2일 한나라당 고위 관계자는 “여권이 당청 관계의 딜레마에 빠졌다”고 표현하기도 했다.
○ “MB와 차별화해야 하는데 ‘티’ 안 나”
이뿐 아니다. 한나라당은 7월 홍 대표 체제가 들어선 뒤 △고소득자에 대한 추가감세 철회 △통일부 장관 교체 및 유연한 상호주의 정책 △대통령 내곡동 사저 백지화 등을 주장해 대부분 관철시켰다. 특히 홍 대표가 현인택 통일부 장관의 교체에 강한 드라이브를 걸 때는 의원들이 “과연 이 대통령이 받아들일까” 하며 반신반의했지만 홍 대표의 바람대로 결론이 났다. 올 상반기만 해도 당과 정부는 이 사안들을 놓고 신경전을 벌였다.
문제는 이런 사안들이 쉽게 풀려 버리자 당이 의도했던 ‘MB와의 차별화 효과’가 거의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 영남지역의 한 재선 의원은 “우리는 ‘이명박 정부와는 다르다’는 걸 강하게 보여주고 싶은데 당의 요구가 너무 빨리 수용되니 도무지 ‘티’가 안 난다”고 말했다. 이슈가 며칠 만에 소멸하니 당이 대국민 홍보를 하고 청와대에 저항하는 모습을 보여줄 틈이 없다는 얘기다. 유승민 최고위원이 1일 최고위원회에서 “당이 이 대통령과 확실히 선을 그을 때가 됐다”라면서 대통령과 더 각을 세울 필요가 있다고 강조한 것에도 이런 고민이 깔려 있는 것으로 풀이된다.
○ MB-홍준표 비밀 담판이 문제?
일각에선 홍 대표가 이 대통령과의 단독 면담을 통해 문제를 담판 지어 버리는 방식이 문제라는 지적도 나온다. 수도권의 한 초선 의원은 “당의 정책 방안에 대해 이 대통령이 거부하고 이를 당이 밀어붙여 대립한 뒤 극적으로 타결돼야 국민이 당의 노력을 알아줄 텐데, 이런 과정은 생략된 채 당청이 함께 가는 모습만 연출되니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르겠다”고 했다. 홍 대표와 이 대통령의 오랜 인간관계가 오히려 당과 대통령의 차별화에 방해가 된다는 역설적인 비판이다.
역대 여당은 정권 말에 대통령과 각을 세워 왔고 이 때문에 노태우 전 대통령을 비롯해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 전 대통령 모두 임기 말에 여당을 탈당했다. 그러나 국민은 당의 대통령 탈당 요구 등 ‘배신의 정치’에는 호의적이지 않다는 점 때문에 한나라당의 고민도 깊어지고 있다.
최우열 기자 dnsp@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