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통 마비 ‘울화통 정치’… 정당-의회 신뢰도 세계 꼴찌 수준
동아일보는 한국정당학회(회장 이현출 국회입법조사처 정치의회팀장) 회원 21명에게 정당정치의 위기에 대한 설문조사를 했다. 정당과 국민을 연결하는 끈이 끊어졌다는 진단이 나왔다.
○ ‘공감 실종’이 위기의 본질
동아일보의 설문조사에 응한 한국정당학회 회원 21명 중 13명이 정당정치가 위기에 처한 원인으로 ‘정당과 국민(유권자 지지자) 사이에 공감 및 일체감이 결여돼 있다’는 점을 들었다. 정치의 주요 기능인 소통이 마비되고 정당이 ‘먹통정치’를 해온 것이 위기를 자초했다는 것이다. ‘고통과 아픔에 대한 위로와 연민’ ‘따뜻함과 권유’ ‘공감과 경청’의 기능을 수행하지 못했다는 지적이다.
또 ‘정당이 공익보다는 사익 추구’(3명), ‘정당 간 극단주의’(2명), ‘정당의 폐쇄성’(1명)도 위기의 원인으로 꼽혔다. 이 밖에 “정당이 정책이 아닌 권력가치 중심으로 운영되며 이념논쟁과 맞물려 극단적 정치투쟁이 증폭 반복되고 있기 때문”(부산대 행정학과 김용철 교수)이라는 의견도 나왔다.
지난달 25일 제주도에서 열린 정당학회 연례학술회의의 주제도 ‘정당정치의 위기와 한국정당의 미래’였다.
김홍국 경기대 정치전문대학원 외래교수는 발표문에서 “전통적 정당지지층이 이탈하고 있다. 정당의 정치적 영향력은 감소하고 정당에 대한 불신은 커지면서 새로운 유형의 정당 등장, 정당의 소멸이나 해체를 거론하는 목소리까지 나오고 있는 것이 현실”이라고 현 상황을 진단했다.
김 교수와 고려대 임혁백 교수(정치학) 등 전문가들은 구체적으로 △다양한 정책적 실패와 사회 모순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는 무능력 △특정 집단·지역의 이익만을 추구하면서 생긴 정체성 위기 △정치적 리더십 부재 △시대 변화와 개혁 요구에 따라가지 못하는 모습 △국회 폭력사태 등 타협과 협상력 부재로 제도권 정치에 대한 환멸 심화 △빠르게 변하는 정보사회의 새로운 패러다임과 기술적 변화를 따라가는 데 실패하고 있는 것을 정당정치 위기의 본질이라고 진단했다.
○ 정당·의회 신뢰도 최저 수준
고려대 행정학과 박종민 교수가 올해 8월 대만에서 동아시아 민주주의를 주제로 열린 학술회의에서 발표한 보고서에 따르면 한국은 아시아권에서 가장 민주화가 발전한 나라 중 하나지만 대의기구인 국회와 정당에 대한 국민의 신뢰는 가장 낮은 수준인 것으로 나타났다.
1212명을 대상으로 한 조사에서 ‘국회를 신뢰한다’고 한 응답자는 7%, ‘정당을 신뢰한다’는 응답자는 9%, 양쪽을 다 신뢰한다는 응답은 4%에 지나지 않았다. 12개 조사 대상 국가 중 의회와 정당에 대한 신뢰도가 가장 낮았다. 이웃 일본은 응답자의 17%가 의회를, 16%가 정당을, 11%가 양쪽 모두를 신뢰한다고 대답했다. 사회주의 국가란 한계가 있지만 일당체제인 베트남의 경우엔 응답자의 95%가 의회, 85%가 정당을 신뢰한다고 대답했다. 중국에서도 응답자의 83%가 의회, 88%가 정당을 신뢰한다고 했다.
○ 정당정치 복원 가능성은
위기의 정당정치의 앞날에 대해선 전망이 엇갈렸다. 일각에서 스웨덴을 중심으로 한 해적당(The Pirate party)처럼 온라인과 오프라인이 결합된 새로운 모델의 디지털네트워크 정당이 기성 정당을 대체할 가능성이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그러나 설문 응답자 21명 중 15명이 ‘가까운 미래에 이런 변화는 일어나지는 않을 것’이라고 답했다.
서강대 박경미 연구교수(정치학)는 “디지털네트워크 정당은 의사소통이 원활하다는 장점이 있지만 정책으로 소화해내기 위한 심도 있는 논의는 불가능하다”고 지적했다. 중앙대 장훈 교수(정치학)는 “당분간 아날로그 정치와 디지털 장외 정치의 공존이 상당 기간 지속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정당정치 체제의 미래에 대해 이현출 팀장은 “기존 정당의 변화와 혁신이 있다면 정당정치가 복원될 수 있을 것”이라며 “시민사회가 정당을 대체할 수는 없다”고 말했다. 성균관대 조원빈 교수(정치학)는 “정당을 구성하는 방식에 변화가 있을 뿐 민주정치 체제의 근간인 정당이 정권을 창출하고 자신들이 대변하는 이해관계를 정책 결정에 반영하는 역할은 변할 수 없다”고 말했다.
결국 내년 총선과 대선을 거치면서 기성 정당들이 과감한 변화와 함께 유연하고 개방적인 정치활동을 통해 시민들의 마음을 되돌릴 수 있느냐가 정당정치의 운명을 결정하게 된다는 것이다.
김기현 기자 kimkihy@donga.com
윤완준 기자 zeitung@donga.com
▼ “무당파 후보, 내년 총선 돌풍 가능성” 21명중 10명 답변 ▼
“여야 모두 편가르기 심해 어느 쪽도 신뢰하지 않아…
정치 무관심→적극적 참여 행동하는 무당파 주목해야”
지난달 22, 23일 동아일보가 리서치앤리서치(R&R)에 의뢰해 실시한 세대별 여론조사 결과 지지할 정당이 없다는 무당파가 응답자의 절반을 넘는 52.3%나 됐다.
‘2030’세대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무당파의 등장에는 ‘기성 정치에 대한 극도의 불신’이라는 필연적 이유가 있다. 공공기관에 근무하는 김모 씨(34·여)는 “이명박 대통령과 한나라당은 기득권 수호에만 전념한 채 여론을 들을 줄 모르고 야당은 이를 견제할 능력과 대안을 갖추지 못했다”고 말했다. 재취업을 준비하고 있는 이모 씨(29·여)는 “(정치인들이) 국민을 대표하는 같은 배를 탄 사람들인데도 편 가르기가 너무 심해 (여야) 어느 쪽도 신뢰할 수 없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무당파의 힘이 내년 총선 국면에서 새로운 정치세력의 등장으로 이어질 것이라고 내다봤다. 동아일보가 한국정당학회 회원 21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서 절반에 가까운 10명이 ‘내년 총선 대선에서 새로운 정당의 등장, 제3후보, 무당파 후보의 정치권 대거 진출이 가능하다’고 답했다.
하세헌 경북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현 정치세력에 대한 국민 비판이 너무 강하기 때문”이라고 단언했다. 고선규 선거연수원 교수는 “국민은 새로운 정치적 아이디어와 정책 프로그램을 제공해줄 새로운 정치 세력과 인재를 요구하고 있다”고 말했다.
‘대거 진출은 가능하지 않다’고 답한 8명도 새로운 정당, 무당파 후보의 출현 가능성 자체는 부정하지 않았다. 다만 “유권자의 선호 변화를 반영하는 유력한 정당이 출현하지 않는 한 기존 정당 후보가 당선될 가능성이 크다”(전용주 동의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데 무게를 뒀다. 반면 신라대 이동윤 교수는 “아무리 혁신과 개혁을 논의해도 항상 제자리걸음이고 그 인물이 그 인물인 한국 정치의 한계 때문에 무당파 후보의 정치권 진출은 어려울 것”이라고 말했다.
아산정책연구원이 한국리서치에 의뢰해 10·26 서울시장 선거 당일 실시한 출구조사 결과에 따르면 무당파라고 밝힌 응답자의 이념 성향은 △중도 55.7% △진보 29.9% △보수 14.4%로 분석됐다. 아산정책연구원 김지윤 여론연구실장은 “무당파는 정치 무관심층이 아니라 정치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행동하는 무당파’라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고 말했다.
윤완준 기자 zeitu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