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도 120% 자유 만끽… 한국사회 사랑하며 살아갈 것”
지난달 30일 두 번째로 만났을 때 장혜영 씨(24)는 서울 홍익대 부근 북카페 ‘그리다 꿈’에서 북콘서트 진행을 준비하고 있었다. 서영수 전문기자 kuki@donga.com
신문엔 딸의 자퇴를 탐탁지 않게 생각하면서도 문자메시지로 ‘믿어야지. 네 인생인데’라고 응원했다는 구절이 있었다. 하지만, 아비의 마음이 어디 그렇기만 하겠는가.
등록금을 마련하지 못할 형편도 아니다. 게다가 딸은 4년 전액 장학금에 생활보조비까지 받고 있었다. 성적이 나쁜 것도 아니다. 1년 전부터 그만 다니겠다고 했다지만 그런 딸이 중앙도서관에 내붙인 ‘공개 이별편지’가 아버지에겐 어떤 편지로 다가왔을까? 아버지의 마음이 궁금했다.
“걔가 가지고 있는 열정, 그걸 믿는 겁니다. 열정이 아니라 욕망만 가지고 있었다면 어떻게든 말렸을 겁니다. 욕망은 자기도 해치고 남도 해치지만, 열정은 자기도 살리고 남도 살리는 것 아닙니까? 정치적인 데 뛰어들어 대학입시에 반기를 드는 것도 아니고…. 자기 열정으로 치열하게 살아가지 않겠나 싶어서 쉽게 인정했습니다.”
딸을 만나봤다. 솔직히 좀 놀랐다. 적어도 내겐, 아버지가 얘기한 그대로였다. 아버지가 딸을 잘 알고 있다는, 어쩌면 지극히 당연한 그 사실에 놀랐다. 엄마는 딸이 중학교에 입학한 직후 집을 나갔다. 종교 때문이었다. 딸은 이후 할머니 집에서 자라다 고교는 기숙사가 있는 경기 하남의 한국애니메이션고등학교에서, 그 다음엔 서울에서 대학생활을 했다. 아버지도 새 사람을 만났다. 그런데도 아버지는 딸을, 딸의 열정과 정신세계를 잘 알고 있었다.
―여주에 가서 아버지를 만났는데 보통의 학부모들은 대부분 잊고 사는 얘기를 많이 하시더라.
“그래도 딸 자랑은 멈추지 않으시죠? 그런 구석이 귀여우시니까. 어릴 때부터 ‘우리 아빠는 다르구나’라고 생각했어요. 낚시를 하고 싶다고 조르니까 ‘너야 재미있겠지만 물고기 생각을 해 본 적이 있느냐?’고 하더라고요. 뭔가를 소중하게 생각하는 감수성을 가르치려고 한 것 아닌가 싶어요. 엄마가 집을 나가고 난 다음 제가 고등학교 가면서부터 아빠랑 얘기를 많이 한 것 같아요.”
“맞아요. 한부모 가정의 외동딸과 아버지 얘기였어요. 부녀의 생일이 같아 딸은 어릴 때부터 항상 아빠랑 같이 생일을 지냈는데 커가면서는 친구들과 보내고 싶어진 거예요. 아빠가 상처받지 않게 조심스럽게 말을 꺼내지만 아빠는 서운해하죠. 딸은 딸대로 이해를 못해주는 아빠가 서운하고…. 딸이 조그만 사과 이벤트를 열면서 끝나는 이야기예요.”
―스토리만 보면 특별히 눈에 띄는 화제작은 아닌 것 같은데….
“다른 사람들에겐 차고 넘치는 게 드라마고 이야기지만 그 당시 저한테는 절절한 얘기였어요. (이번에 자퇴 선언문을 붙이고 난 다음) 신문기사도 비슷해요. 사람들은 저를 보는 게 아니라 화젯거리를 보는 거죠. 그게 슬퍼서 다시 앰프를 대놓고 마이크로 글을 읽었어요.”
그녀는 ‘공개 이별선언문’을 붙인 지 일주일 만인 지난달 22일 학교를 다시 찾아가 ‘새로운 연애를 시작하며’란 글을 낭독했다.
―그렇게 아팠나. 하지만 자퇴를 개인적 선택을 넘어 ‘사회적 질문’으로 던진 마당에 그 정도 반응들은 각오했어야 하지 않나.
“알고 있죠. 하지만 아는 것과 실제로 아픈 건 다르잖아요? 모진 소리 때문이기도 하지만 사람들이 얼마나 팍팍하게 살고 있는지, 그게 슬픈 거죠.”
―서울시립청소년직업체험센터(하자센터)에서 당분간 태국 마사지를 가르칠 생각이라던데, 거기도 새로 사랑하기로 한 한국 사회 중 한 곳인가.
“하자센터는 전부터 관여하던 곳이에요. 올 초 태국 전통무용을 배우러 갔다가 마사지를 알게 됐는데 정말 장난 아니게 좋았어요. 잘하는 사람이 만지면 제 몸을 알아요. 언어를 뛰어넘는 일대일 커뮤니케이션이죠. 감동이고 예술이었죠. 그래서 여름에 배우러 갔어요. 영어로 진행하는 국립마사지학교 코스인데 아침 먹고 마사지하고, 점심 먹고 하고, 저녁에 복습하고… 스파르타식이었어요. 근육 이름을 영어로 외워야 하는데 미치겠더라고요. 여하튼 한 달 만에 시험에 붙었어요.”
―아버지 말로는 영어를 잘한다던데….
“(웃으며) 그래도 이두근, 삼두근, 가자미근을 어떻게 알겠어요.”
―아무리 실업계 전형이라고 해도 신생 특성화고에서 연세대 가기가 쉽지 않았을 텐데 공부는 어떻게 했나.
“원래는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에 들어가려고 했어요. 애니고에서 영상을 전공했거든요. 학원을 다녀본 적은 없지만 나름대로는 떨어지지 않을 거라는 자존심이 있었어요. 그런데 똑 떨어지더라고요. 그때가 여름이었는데, 몇 가지 길을 생각했죠. 첫째 대학을 안 간다, 둘째 예종을 다시 본다, 셋째 대학수학능력시험을 친다. 문득 아버지의 낙담한 얼굴이 스쳐 지나갔어요. 그게 싫었어요. 9, 10, 11월 석 달 동안 미친 듯이 공부했죠. 제가 연세대 모집공고를 보고 있는데 친구가 지나가면서 ‘혜영아, 연세대 가니?’ 하면서 코웃음을 치는 거예요. 그래서 ‘이 새끼, 두고 보자’고 했죠. 그래도 학교가 수능을 준비시켜 주는 곳이 아니니까 주변에선 불안해했어요. 하지만 전 불안하지 않았어요. 실업계 전형이라고 해도 수능 4개 영역 중 3개 영역은 2등급 이상이 돼야 해요. 긴장할 수밖에 없는 입시조건이지만 저는 반대로 1개 영역은 버려도 된다는 얘기라고 생각했어요. 고마운 일이죠. 그런 면에서는 수능이 나름 평등하다고 생각해요.”
그녀의 ‘공개 이별선언문’이 대학의 존재 이유에 대해 근원적인 질문을 던진다는 점에서는 김예슬의 대자보와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러나 세상을 대하는 태도는 사뭇 달라 보인다.
올 3월 고려대 경영학과를 자퇴한 김예슬은 ‘오늘 나는 대학을 그만둔다, 아니 거부한다’는 대자보에서 대학을 ‘이름만 남은 자격증 장사 브로커’라고 규정한 뒤 “나의 적이지만, 나만의 적은 아닐 것이다”라고 했다. 분노와 슬픔, 저항의식으로 일관된 선언문이었다.
―서울대 유윤종, 고려대 김예슬의 자퇴 선언 뉴스를 봤나.
“서울대는 몰랐고, 김예슬은 봤어요. 이별편지를 쓴 이유 중에는 김예슬 씨의 대자보도 들어있어요. 문제를 세게 날리는 데는 그 이상 잘할 수 없었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너무 모진 것 같아요. 제가 연애편지를 가지고 나온 것도 그 때문이에요. 사귀다 보니까 이게 아닌데 싶어서 헤어지는 마당에 ‘넌, 아니야’ ‘넌 몹쓸 애야’ 하는 식으로 어떻게 그렇게 깡그리 집어던질 수가 있는 거죠?”
사실 그녀의 이별편지가 김예슬의 선언문처럼 그렇게 모질었다면 인터뷰를 하고 싶다는 생각도 들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지금 연세에게 천(千)의 고마움과 천 하나의 아쉬움을 담아 작별을 고합니다. 고마워, 학교야. 근데 우리 이제 더는 아냐.”
“나는 나의 변심을 변호하기 위해 한때의 연인을 깡그리 몹쓸 존재로 전락시키는 이별은 하고 싶지 않습니다. 내가 떠나는 까닭은 그저 여름이 가을로 변하듯 내 마음이 어느새 학교를 떠났기 때문입니다.”(이별편지 중)
―편지에서 ‘내 마음이 학교를 떠난 이유는 또 다른 긴 사연’이라고 했다. 한 살 아래 동생이 1급 정신지체장애라고 들었는데, 동생의 상황도 그 ‘긴 사연’ 중 하나인가.
“제 모든 성장기 기억은 동생과 함께 시작돼요. 동생은 제 세계의 전부였어요. 비유가 아니라 물리적으로 그랬어요. 엄마가 집에 없으니까 저에게 산다는 것은 동생과 얼마나 하루를 잘 보내느냐는 것이었어요. 그런데 저는 그런 상황을 수긍했어요. 힘든 건 동생한테 뭘 해줘도 애는 카오스라서…. 맛있는 걸 해줘도 걔가 좋아하는지 싫어하는지 알 길이 없잖아요. 어쨌든 동생한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수 있는 사람이 되자고 공부도 열심히 했어요. 의사가 되려고요. 그리고 동네 어른들처럼 (혹시 동생에게 위해를 가할지 모르는) ‘힘 있는 사람들’에게 특히 잘했어요.”
―동생은 지금 재활원에서 생활한다고 들었다.
“떨어지고 나서 한 달 뒤 가보니까 동생이 너무 잘 지내는 거예요. 그걸 보고 죽고 싶었어요. 그때까지 내 삶을 끌어온 전제가 동생이었는데 기본 전제가 깔끔하게 사라져버린 거잖아요? 내가 없어진 거죠. 그때부터 가치, 진리에 대한 갈구 같은 게 시작됐는데, 사실 그런 게 없잖아요? 에잇 제기랄, 결국 취향이구나라고 생각했죠.”
‘결국 취향이구나’라는 말이 오래 남는다.
대학의 존재 이유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언명(言明)이 있다. 혜영이 다녔던 연세대만 해도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는 것이다. 진리를 깨닫게 되면 자유로워진다는 뜻이다. 공자가 말한 불혹(不惑), 지천명(知天命), 이순(耳順)과 비슷한 자유일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대학은 진리를 찾기 위한 질문의 과정은 없고, 대신 싸구려 답을 외우라고 한다.
혜영은 ‘이별편지’에서 그걸 이렇게 말한다. “대학이 문제입니까? 대학생에겐 그렇습니다. 고등학교가 문제입니까? 고등학생에겐 그렇습니다. 중학교는 중학생에게, 초등학교는 초등학생에게 문제입니다. 다 같고, 늘 같았습니다. 문제는 언제나 삶이었지요. 사실 삶은 문제가 아니라 질문입니다.”
연세대를 자퇴한 지 일주일 뒤 다시 학교를 찾아‘새로운 연애를 시작하며’라는 글을 공개했다. 장혜영 씨 제공
―그래서 결국 ‘취향’만 남았다는 것인데, 그렇다면 조용히 자퇴해도 되는 것 아닌가.
“작년 중간고사 때부터 학교에 안 가고 일본 지진 현장으로, 태국으로, 프랑스로 다녔어요. 처음엔 그냥 아무 소리 없이 사라지려고 했어요. 자퇴서 내는 것도 귀찮았으니까요. 그런데 한 1년 전부터 생각이 바뀌었어요. 다니면서 스스로 묻고 답하는 시간을 가졌는데 그렇게 그만두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별에도 예의가 있어야겠구나, 스스로 납득할 수 있는 이유가 없으면 나중에 이 커뮤니티에 아무런 말도 할 수 없겠구나, 왜 떠나는지에 대한 변(辯)을 남겨야겠구나’라고 생각했어요.”
당돌한 변이다. 나중에 내가 옳았음을 반드시 보여주겠다는 얘기 아닌가.
김창혁 전문기자 cha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