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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재현 기자의 망연자실]설 곳 없는 배우들이 목 놓아 부른 “레미제라블”

입력 | 2011-12-06 03:00:00

◇ 연극 ‘레미제라블’ ★★★☆




1회 공연에 무려 39명의 배우가 출연하는 연극 ‘레미제라블’의 시민군 봉기 장면에서 출연자들이 “그대 기억하는가/그 행복했던 시절을/우리 너도 나도 젊은 시절에/가진 것 없어도 서로 사랑하기를/오직 그것만을 바 라고 바라던 시절”로 시작하는 노래를 열창하고 있다. 50대 연기자그룹 제공

요즘 대학로 연극에선 보기 힘든 대작이었다. 출연배우만 39명. 두 가지 이상 배역을 맡은 배우들까지 합치면 7세 소년부터 70대 노인까지 60명에 이른다. 상연시간도 15분의 중간 휴식시간을 포함해 3시간으로 대형 뮤지컬을 능가한다.

연극이지만 뮤지컬 뺨치게 무대전환도 많았다. 조금은 어설펐지만 레일을 활용한 무대세트 이동 장면도 등장했다. 이 덕분에 풍성하면서도 섬세한 미장센이 빚어졌다. 그 미장센을 더욱 아름답게 수놓은 다섯 곡의 창작곡을 포함한 음악(박진규)과 조명(최형오)도 빼어났다. ‘50대 연기자그룹’(회장 윤여성)이 기획한 연극 ‘레미제라블’(국민성 대본, 박장렬 연출)은 겉치레만 요란할 것이란 예상을 뒤엎고 감동적인 무대를 선사했다.

50대 연기자그룹은 1980년대 초 연극배우들의 권익 보호를 내걸고 결성됐던 ‘30대 연기자그룹’ 소속 배우들이 새롭게 결성한 단체다. 1981년 박봉서 최종원 박인환 최주봉 정상철 이승호 문영수 씨 등이 주축이었던 ‘30대 연기자그룹’은 당시 열악한 연극배우들의 처우를 개선하기 위한 방안으로 최저 출연료 보장과 출연계약서 작성 의무화 등을 요구해 연극계에 파장을 몰고 온 주역이었다.

이들이 뿌린 씨앗은 1991년 한국연극배우협회 결성이란 열매를 맺었다. 이후 동년배 배우들의 친목모임으로 명맥을 유지하던 이들은 최근 대학로에 설 곳이 없는 연극배우들의 열정과 주인의식을 되살리자는 취지로 정통연극 명작시리즈를 기획하면서 그 첫 작품으로 되도록 많은 배우가 참여할 수 있는 레미제라블을 택했다.

50대 연기자그룹 소속 배우들은 노개런티 출연을 자청했다. 오디션을 통해 선발한 젊은 배우들에겐 연습기간 석 달과 공연 기간 한 달을 포함해 넉 달간 최소 개런티 제공을 약속했다. 그 대신 대본 연출 무대 조명 음악에 참여한 제작진에겐 실비만 제공하기로 했다. 그래도 전체 예산이 2억 원에 이르렀다.

보통 이렇게 제작 자체에 의미를 부여하는 작품은 실망스러운 경우가 많다. 그러나 레미제라블은 달랐다. 출연 배우가 워낙 많다 보니 배우들의 연기가 고르지 못하고 일사불란한 맛은 떨어졌다. 무대 전환이나 음향에서 가끔 삐걱대는 구석도 노출했다. 분명 대형기획사의 공연에 비해선 2% 부족했다.

하지만 그것을 채우고도 남을 만한 무언가가 있었다. 극이 후반부로 갈수록 그 무언가가 뿌린 씨앗이 자라면서 소담한 꽃을 피우고 향긋한 열매를 맺는 게 느껴졌다. 그게 무얼까.

세상으로부터 버림받아 불평불만에 가득 찼던 존재에서 누군가를 위해 기꺼이 자신을 희생할 줄 아는 존재로 거듭 태어난 장발장의 이야기가 주는 근원적 감동 때문일까, 아니면 ‘우리는 비참한 사람들’을 되뇌는 주제곡 ‘비참한 사람들’(레미제라블의 뜻)과 ‘우리는 불행한 사람들’로 시작하는 ‘우리들 가진 것은 동전 한 닢뿐’이란 노래와 묘하게 공명하는 연극배우들의 신산한 삶 때문일까, 아니면 바리케이드 안에 갇힌 파리시민들이 ‘그대 기억하는가/그 행복했던 시절을… 가진 것 없어도 서로 사랑하기를/오직 그것만을 바라고 바라던 시절’을 부르며 깊은 동지애를 나누는 장면이 환기시키는 연극배우들의 진한 연대의식 때문일까.

권재현 기자 confetti@donga.com   

:i: 장발장 역으로 이승호 정상철 강희영 씨, 자베르 경감역으로 고인배 차재성 씨가 번갈아 출연한다. 오현경 문영수 씨는 마리우스의 외할아버지 질노르망 역으로, 박웅씨는 미리엘 주교 역으로 출연한다. 18일까지 서울 대학로 아르코예술극장 대극장 3만∼7만 원. 02-929-867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