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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2/현장 체험]외국인 교환학생의 국내기업 인턴 근무 지켜보니… 눈치로 고객 커피주문 척척 소화

입력 | 2011-12-10 03:00:00

한국말 못해도 눈치로 고객 커피주문 척척 소화




“잘못하면 우유가 넘쳐 위험하니까 반드시 우유 표면과 봉이 수직이 되게 하세요.” 점장 정은 씨(31)의 설명을 알아듣지는 못하지만 네 사람의 눈빛이 반짝거린다. 왼쪽부터 정은, 릴리 니우, 첸샤오옌, 마리아 판 호이동크, 아이게림 암레노바 씨. 변영욱 기자 cut@donga.com

“계산하기 전에 진동 벨을 눌러 대기번호를 설정해주셔야 돼요. 이 버튼 보이시죠?”

한국말을 전혀 알아듣지 못하는데도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짧은 영어로 다시 한 번 설명해 줘야 하나 고민하는 순간. 어느새 그녀의 손가락이 정확히 한글로 ‘대기번호’라고 적힌 버튼을 눌렀다. 설마 점장의 손가락만 보고 버튼의 위치를 외워버린 것일까.

“읽을 줄은 알아요, 아주 조금.”

전반적인 설명이 끝나고 이번에는 기자와 함께 점장이 불러주는 대로 직접 주문을 한 번 입력해 보기로 했다. 그새 머릿속에서 주문 순서가 실타래처럼 뒤죽박죽 엉켜버려 갈 곳을 잃은 손가락이 화면 위를 어지럽게 맴돌았다. 반면에 그녀의 검지는 느리지만 차근차근 버튼을 누르고 있었다. 다소 자괴감이 들었다. 머리만 좋으면 언어는 문제가 안 되고 모든 것이 쉬운 걸까.

그녀의 이름은 릴리 니우(20). 미국 텍사스주립대에서 국제경영을 전공하는 중국계 미국인이다. 현재 동국대에 교환학생으로 와 있는 그녀가 3일 오전 대홍기획 ‘글로벌 프리 인턴십(Global Pre-Internship)’ 과정 중 하나로 한 커피전문점에서 짧은 아르바이트를 하기로 했다. 인턴십에 참여하고 있는 또 다른 동국대 교환학생인 마리아 판 호이동크(23·네덜란드), 첸샤오옌(錢曉姸·20·중국), 아이게림 암레노바(23·카자흐스탄)도 함께였다. 이들은 모두 여학생이다.

○ 카페라테의 한국식 발음?

“왓 우드 유 라이크(What would you like)?”

“정말 영어로 주문해야 돼요?”

카운터 앞에 마주선 40대 남자 손님이 멋쩍게 웃으며 되물었다. 눈길은 말을 건넨 검은색 커트 머리의 릴리가 아닌, 옆에 서 있는 기자를 향해 있었다. 어색한 미소를 지어보이며 고개를 끄덕여줬다.

“카페라테.”

그녀의 발음과 확연히 대조되는, ‘된장 냄새’가 잔뜩 묻어나는 짧은 ‘영어’가 그의 입에서 수줍게 튀어 나왔다.

릴리가 ‘카페라테’ 버튼을 누르려다 다시 되물었다.

“레귤러 오어 라지(Regular or large)?”

“레귤러.”

이번에도 짧은 대답이 돌아왔다. 릴리의 등 뒤에 서 있던 샤오옌이 이리저리 버튼들을 들여다보던 그녀에게 알아들을 수 없는 중국어를 쏟아냈다.

“다국적 카페예요? 생긴 건 딱 한국 사람들인데….”

릴리가 건네주는 영수증과 진동 벨을 받아든 손님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자리를 찾아 떠나갔다.

“와, 한국 사람들 진짜 친절하고 참을성 많아요. 릴리가 주문받아 더 오래 걸렸는데….”

샤오옌이 말했다.

옆에서 지켜보던 마리아에게 물었다. “혹시 네덜란드에서 커피숍 아르바이트 해본 적 있어요?”

“아니요. 사실은 커피도 몇 번 안 마셔 봤어요.”

마리아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샤오옌, 릴리도 마찬가지였다. 아이게림만이 이탈리아 레스토랑에서 서빙을 해본 적이 있다고 대답했다. 흔히 그렇듯, 외국 학생들은 어린 나이에도 한번씩 커피숍 아르바이트는 해보는 줄 알았다. 그런데 그것도 아닌가 보다. 대학시절 커피숍에서 일해본 적 있다며 자랑을 늘어놓으려는데 네 사람이 점장에게 쪼르르 달려간다. 가만히 들어보니 메뉴판을 가리키며 어떻게 발음하느냐고 묻고 있었다. 옆에 다 영어로 적혀 있는데.

○ 아이디어 쏟아진 프레젠테이션 회의

“7kg의 힘으로 꾹 눌러 주세요. 이때 수평이 되도록 하는 게 중요해요. 그리고 25∼30초에 에스프레소가 나올 때 커피 맛이 제일 좋아요.”

커피 만드는 법에 대한 점장의 설명이 이어졌다. 네 사람의 눈길이 또다시 일제히 나를 향했다. ‘세븐 킬로그램(seven kilogram), 플랫(flat), 비트윈 투웬티파이브 앤드 서티 세컨즈 이즈 굿(between 25 and 30 seconds is good)’이라며 중요 단어 위주로 띄엄띄엄 설명을 해줬다. 도저히 안 되겠는지 점장이 한 명씩 직접 손을 잡고 해보며 가르쳐주기로 했다. 한시름 덜었다. ‘백견(百見)이 불여일행(不如一行)’이라는 말처럼 네 사람 모두 이내 척척 커피를 만들어냈다. 하지만 모두 10초대로, 정확한 시간을 맞추지는 못했다.

“이렇게 딱 표준화된 과정에 맞춰 커피를 만드는 줄 몰랐어요. 많은 경험을 필요로 하는 굉장히 전문적인 일인데요.” 샤오옌이 소감을 밝혔다.

“차(茶) 문화에 익숙한 중국사람들이지만 중국에서도 한류가 거센 만큼 ‘바링허우(80後·1980년 이후 출생자들)’들을 타깃 고객으로 설정하면 좋을 것 같아요. 그리고 직접 자신이 마실 커피를 만드는 DIY 제품을 내놓으면 어떨까요?”

이들은 지난달 이 커피전문점의 임원들 앞에서 해외 진출 전략에 관한 프레젠테이션을 했다. 다양한 국적을 지닌 학생들이 모인 만큼 자신들이 떠나온 고국의 현실에 맞춘 아이디어들이 쏟아졌다.

“카자흐스탄의 쇼핑몰에는 어린아이들이 놀 수 있는 공간이 많이 있어요. 커피숍에 어린 아이들도 데리고 올 수 있도록 내부를 꾸미는 것도 좋은 방법일 거예요.(아이게림)”

“유럽의 남성들을 끌어들이기 위해서는 이 ‘천사’ 이미지를 조금 희석시킬 필요도 있어요. 유럽 남성들은 여성적 이미지를 썩 좋아하지 않거든요.(마리아)”

미국인이지만 중국어에도 능통한 릴리는 중국 진출 전략에 대해 발표했다. 그녀는 중국 진출 시 적합하다고 생각되는 상호, ‘톈 미 카페이(달고 비밀스러운 커피)’를 만들어 제시할 만큼 적극적이었다.

“생각보다 고객과 소통할 기회가 많지 않았어요. 손님들에게 더 가까이 다가가기 위해서 소소한 대화를 늘려보면 어떨까 생각했어요. 그리고 메뉴가 정말 많은데 사람들은 보통 자기가 마시던 것만 마시잖아요. 제품에 대해 구체적으로 설명해 주는 것도 좋을 것 같아요. 이러한 작은 것들이 큰 변화를 만들 수 있을 것이라고 믿어요.”

그 정신없는 순간들 속에서도 그렇게 섬세한 지점들을 놓치지 않고 지켜보다니 놀라웠다.

학생들은 커피전문점 이외에도 패스트푸드점, 백화점, 할인점 등을 돌며 5주간 인턴 수업을 했다. 매주 다른 프레젠테이션이 과제로 주어졌다. 트위터, 페이스북 등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이용해 고국에 있는 친구들에게 설문조사를 하기도 하고, 한 학생은 발표하기 위해 아버지가 계신 대만을 찾아 백화점을 둘러보고 오기도 했다. 이들은 매번 굳은 표정에 떨리는 목소리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이 준비한 프레젠테이션을 또박또박 선보였다.

처음에는 한국의 조직문화에 익숙지 않아 지도교수인 여준상 동국대 교수(경영학)에게 눈물이 날 만큼 혼이 나기도 했다. 인사하는 법부터 다시 배웠다. 하지만 학생들이 내놓은 결과는 기대 이상이었다.

“외국인 교환학생들이 과거에 비해 정말 많이 늘었어요. 그중에는 정말 깜짝 놀랄 정도로 뛰어난 친구도 많아요. 그런데 이 친구들이 한국에 와서 그냥 몇 개월 머물다 가면 끝이에요. 뛰어난 학생들을 우리가 활용할 방안이 없을까 고민하다 이 인턴십을 계획하게 됐습니다.”

여 교수의 말이 가게를 나설 때까지 머릿속을 맴돌았다. 한류 열풍 속에서 우리가 잊고 있었던 한 단면을 훔쳐본 듯했다.

박희창 기자 ramblas@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