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1>토끼의 뿔과 거북의 털을 구하러 다녔소
1962년 1월 비구와 대처승 대표들이 통합종단에 관한 논의를 하고 있다. 1970년 대처 측의 태고종 창종으로 불교정화운동은 공식적으로 마무리된다. 국가기록원 제공
1962년 4월 비구와 대처승이 함께 참여하는 통합종단이 탄생했다. 그러나 통합종단의 출범은 분쟁의 끝이 아니라 또 다른 갈등의 출발점이었다. 무엇보다 통합의 힘 자체가 갈등 당사자인 비구와 대처 측으로부터가 아니라 5·16군사정변 이후 초법적인 존재였던 국가재건최고회의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이다. 특히 대처 측은 비구 위주의 통합 과정에 불만스러워하면서도 최고회의의 위세에 눌려 끌려갈 수밖에 없었다.
대처 측의 불만은 곧 종단의 국회 격인 초대 종회를 구성하면서 터져 나왔다. 종회의원을 50인으로 구성했는데 비구 32인, 대처 18인이었다. 대처 측은 동일 비율로 종회를 구성해야 한다고 반발했다. 이어 서울 서대문에 별도의 총무원을 설립한 뒤 ‘한국불교 조계종’ 간판을 내걸었다. 그러나 이에 앞서 제정된 불교재산관리법은 통합종단을 유일한 불교 종단으로 인정하고 있었기에 서대문 총무원을 불법단체로 규정했다.
1970년 1월 통합종단의 총무원장을 지낸 대처 측 박대륜 스님 등이 태고종을 창립한다. 당시 문화공보부에 의해 몇 차례 서류 보완 지시를 받은 태고종은 5월 불교단체 등록을 끝내고 정식 종단으로 출범했다.
통합종단이 도의 국사를 종조(宗祖)로 한 반면, 태고종은 태고 보우(太古 普愚·1301∼1382) 국사를 종조로 했다. 태고종은 보우 국사의 사상에서 교와 선의 일치, 정토와 선의 융합, 세간과 출세간의 원융도 강조했다.
정화운동은 태고종 창종으로 막을 내리게 된다. 어디까지나 공식적인 차원이다. 다른 살림으로 갈라서 종권 분쟁은 끝났지만 선암사, 봉원사 등 개별 사찰을 둘러싼 갈등은 최근까지 계속됐기 때문이다.
사실 태고종 창종은 어쩔 수 없는 길이었다. 1969년 10월 대처 측이 제기했던 종헌 결의 무효 소송에 대해 이유 없다는 대법원의 최종 판결이 나왔다. 법적 소송을 통해 통합종단을 부정하려던 대처 측의 기도가 최종적으로 무산된 것이다. 이어 몇몇 사찰의 관할권을 둘러싼 소송 역시 불교재산관리법을 근거로 모두 통합종단에 유리하게 판결이 나왔다.
정화운동의 본질은 일제가 강점하면서 초래된 우리 불교의 청정성(淸淨性)과 수행 풍토의 회복이었다. 그러기에 승려의 자격 문제, 곧 대처(帶妻) 문제는 타협할 수 있는 사안이 아니었다.
태고종의 정화운동에 대한 공식적인 주장은 이렇다. “광복 이후 ‘불교법난의 시련’을 거쳐 오늘에 이르는 동안 시종일관 주창하며 그의 실천을 다짐했던 것이 종조인 태고 보우 국사의 중심사상을 계승….” 비구의 정화운동은 대처의 입장에서는 ‘광복 이후 불교법난(佛敎法難)’이었던 셈이다.
나는 정화운동 과정에서 조정래 소설가의 부친인 조종현 스님 등 대처 측 스님들과 적지 않은 인연을 맺었다. 교육과 역경, 포교에서 기여한 대처 스님도 적지 않았다.
정화운동의 세세한 줄기에는 다양한 사연과 문제점도 적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 불교를 바로세우기 위해서는 불가피했던 도도한 시대적 흐름이었다.
<30>회에서 송월주 스님은 조계종 50년 종단사(史)에서 가장 뜨거운 시기로 평가받는 94∼98년 종단개혁의 격류 속으로 들어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