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탄의 율 브린너 스티브 아저씨, 학생들은 '프로페서 엑스'라고 불러●한국의 역사를 꼼꼼하게 탐사하고 올린 동영상 대인기
화성 동탄시에 3년째 거주중인 전문여행가 스티브 밀러(40)씨.
"유리병 쓰레기만 해도 3종류로 구분해요. 한국이 얼마나 리사이클(재활용)에 대해서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는 지 알 수 있는 대목이에요…"
그의 동영상은 한 평범한 오피스텔 지하에 위치한 쓰레기 분리 수거대 앞에서 시작한다. 한국에서는 무척이나 익숙한 광경이다. 종이, 책, 플라스틱 등으로 구분된 박스 안에 쓰레기를 나눈다. 유리병은 소주병과 맥주병, 깨진 유리, 기타유리 등으로 구분되어 있다. 그는 이 대목에서 감탄사를 아끼지 않았다.
"미국에선 그저 진짜 쓰레기와 재활용이 가능한 것, 이렇게 두 가지로 구분할 뿐이에요. 그런데 한국은 10여 가지가 넘어요. 우리 아파트 지하실은 전 세계 재활용 센터의 모범이에요."
미국인 스티브 밀러(40). 그가 화성 동탄시에 거주한지도 3년이 넘었다. 동네 주민들은 그를 '동탄의 율브린너'로 부른다. 2미터에 근접한 큰 키에 영화배우를 닮은 매끈한 두상은 확실하게 눈에 띠는 존재다.
"어떤 분들은 영화 스타트랙을 언급하거나 혹은 브루스 윌리스를 닮았다고도 말해요. 하하. 그런데 제 학생들은 '프로페서 엑스(X)'라고 불러요. 영화 엑스맨 때문인 듯해요. 확실하게 세대 차이가 있지요?"
그는 비단 남다른 외모 때문으로만 주목 받는 것은 아니다. 그는 어디서나 카메라를 꺼내들고 한국의 신기하고 흥미로운 측면을 카메라에 담고 현장 생중계를 한다. 단순하게 한국의 겉모습만 취재하는 것이 아니다. 집에서는 한국의 역사와 문화를 연구하고 다시 심도 깊게 분석하고 논평한다.
그의 동영상 블로깅(www.youtube.com/qiranger)은 인터넷에서도 큰 인기다. 그의 비디오를 찾아보고 억지로 한국을 방문하는 이들도 적지 않을 정도다. 뿐만 아니라 그는 팟캐스트 방송국까지 운영할 정도로 열성적인 한국문화를 해석하고 전파한다. 이른바 그는 한국문화를 알리는 '인터넷 특파원'인 셈이다.
■ "수원의 화성은 세계적인 보물…널리 알려야"
"단순하게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것만으로는 의미가 없어요. 역사와 문화에 대한 배경지식이 함께 전달되면 그 가치가 엄청나죠. 경복궁이 아름다운 것은 이제 상식이지만, 그 뒤에 깔린 수많은 역사적 가치들은 모르고 지나가는 관광객들이 태반이에요. 그게 안타깝습니다."
그는 전문여행가다. 그가 세계를 여행하면서 만든 블로그는 www.Qiranger.com이다. 동양 사상인 '기(氣)'와 미국국립공원 경비대인 '파크레인저'를 결합한 그의 모토란다. 그의 블로그에 가면 전문여행가가 한국을 바라보는 관점에 대해 한눈에 알아챌 수 있다. 단순한 여행기나 체험기가 그가 보다 거시적 관점의 문화보고서라고 해야 옳을 것이다.
"제 병명이 바로 '치(氣)레인저'입니다. 저도 한국 사람들처럼 기를 느낄 수 있어요. 하하"
미국 애리조나 출생인 그는 생물학과 교육학을 전공하고는 일찍부터 중국계 아내와 함께 전 세상을 탐험하고 살았다. 그는 이전에 한국과 어떠한 인연도 없었다. 그저 동아시아에서는 중국과 일본을 공부하다가 우연히 한국을 방문한 것이다. 그런데 한국의 매력에 반해 그대로 눌러 앉았다.
"3년 전 한국에 왔을 때 알고 있는 것이라곤 미국드라마 '메시'와 한국전쟁이 거의 유일했어요. 신기하지 않나요? 미국인이 한국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이라곤 그게 전부라니 말이죠. 그런데 한국의 역사를 공부하게 되니 마치 금광을 발굴한 것 같은 느낌을 받았어요…그래서 직접 살면서 연구해보기로 결심했습니다."
가끔 그를 의아하게 바라보는 사람도 없지 않다. 뚜렷한 목적 없이 부부가 한국으로 이주한 것에 대한 신기함의 표현이다. 그러나 이렇게 세상을 유랑하며 살아가는 이들이 세상엔 제법 된다. 다만 보통 이들은 따뜻한 남쪽나라를 향하는 이들이 많았지만 이젠 추운 한국을 찾는 이들도 제법 된다는 점이다.
전문여행가인 스티브 밀러가 한국의 제1경으로 꼽은 수원의 화성. 역사와 전통이야 말로 한국의 내세울 제1의 자원이라고 주장한다.(동아일보 DB)
그는 평소엔 성결대학에서 교양 영어을 강의한다. 그리고 주말이면 한국의 구석구석을 여행한다. 화성 동탄에 거주하게 된 것은 순전히 우연이었다. 그런데 그는 그곳에서 정조대왕의 화성(華城)을 발견했다. 그는 이제 가장 열성적인 '화성예찬론자'다.
"놀랍지 않나요? 화성에는 조선이란 나라의 거의 모든 것이 담겨있어요. 역사와 철학 그리고 세계관 심지어 미래 비전까지 말이죠. 이것을 제대로 감상하지 못한 다면 한국을 못 본 것이나 다름없어요. 제가 한국에서 발견한 가장 위대한 역사 자원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가 외국인에게 추천하는 한국의 관광지는 '제주도' '강원도 속초' '부산' '전주' 등 주로 서울이 아닌 지방도시들이다. 서울은 그저 쇼핑하기에 편리한 도시일 뿐 한국이란 나라를 조망하기엔 적합하지 않다는 이유에서다.
"그런데 서울의 수많은 산들만큼은 위대하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산이 좋아서 애리조나에서 국립공원에서 일하기도 했던 사람이에요. 관악산 북한산 인왕산…. 한국의 아름다운 산들에 대해서만큼 부러움을 금치 못하겠어요."
한국에 아무런 연고 없이 도착한 그는 독자적인 한국연구로 세계 여행자들로부터 한국의 전문가로 꼽힐 정도가 됐다.
■ "당분간 서울이 내인생의 베이스캠프"
동양문화에 관심이 많아서인지 아시아의 전통문화나 한의학에 대해서도 관심이 많다. 서구의 문화를 충분하게 보완하고 공존할 수 있을 것이란 생각 때문이다. 때문에 우리나라의 문화정책에 대한 불만도 내비쳤다.
"한국과 서울을 단순히 서울을 예쁘고 화려하게 치장하고 광고하는 것에 대해선 좀 의아하게 생각합니다. 외국인들은 한국이란 나라가 생소한 이유는 '역사'를 모르기 때문이에요. 하지만 역사를 알게 되면 관심과 흥미를 느끼게 됩니다. 전통문화가 첫 번째가 되어야 합니다."
그가 가장 슬펐을 때는 이제 막 관심을 가졌던 한국의 국보 1호인 남대문이 처참하게 불탔을 때라고 했다. 어떻게 남대문이 복원될지, 또한 서대문의 부활에 대해서도 관심을 쏟는다.
그는 자신이 탐구한 한국에 대한 리포트를 접하고 한국에 대한 관심을 지니게 된 이들이 많아지는 것에 행복을 느낀다. 가치 있는 새로운 것을 공유하는 것이야 말로 여행자의 진정한 보람이기 때문이란다.
"여행자들은 어디서나 동질감을 느낍니다. 어차피 우리 모두는 여행자 아닌가요? 하나의 지구 위에서 살고 있다는 것은 변함없어요. 수원 화성이 세워질 당시는, 아메리칸 원주민들이 이주할 때였고 유럽은 산업혁명이 치열하게 벌어지던 때였죠. 이것이 공유될 때 미국인과 한국인이 서로 친구가 될 수 있을 것으로 봅니다."
그는 앞으로 상당기간 한국을 베이스캠프로 삼아 전 세계를 여행할 예정이라고. 당분간 한국보다 더 살기 좋은 나라를 찾기 힘들기 때문이란다. 그의 동반자인 그의 아내는 자료를 조사하고 정리하고 현장에서는 함께 사진을 찍는다. 어느새 이들 부부는 한국의 전문가가 되어버린 것. 인터뷰를 끝마친 그는 곧장 번지점프를 하기 위해 분당으로 향했다.
"날씨가 춥지 않냐고요? 영상 6도나 돼요. 바깥활동을 하기에는 최적의 날씨에요. 여러분도 한국을 보다 즐기길 바랍니다."
정호재 기자 demia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