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4>토끼의 뿔과 거북의 털을 구하러 다녔소
1994년 당시 총무원장 3선을 강행했던 의현 스님(왼쪽)이 4월 13일 오전 사퇴 의사를 밝히기에 앞서 측근들과 함께 서울 대각사 대웅전에서 아침예불을 올리고 있다. 동아일보DB
사흘 뒤인 3월 29일 새벽, 괴청년 수백 명이 조계사에 난입해 스님들을 폭행하며 해산시키려고 했다. 스님들이 완강히 버티자 이번에는 경찰 1600여 명이 투입돼 법당의 스님들을 내쫓았다. 30일 새벽 경찰은 다시 조계사 경내에서 농성하던 스님 470여 명을 강제 해산 연행했다.
의현 스님의 3선에 대한 의지는 강했다. 이날 오전 경찰의 비호 속에 열린 임시종회에서 거수 표결을 통해 의현 스님은 다시 총무원장에 선출됐다. 이에 범종추는 정부의 경찰 투입을 ‘제2의 법난’으로 규정하고 정부의 공식 사과, 총무원장 선출 무효, 의현 스님의 즉각 사퇴를 요구했다.
“총무원이 조계사 부근 호텔에 조직폭력배들을 집결시켜 기습작전을 준비했다. 서울 종로경찰서도 당시 폭력배들의 호텔 숙박 사실을 파악하고 있었다. …이들이 묵은 청진동 호텔의 숙박비 490만 원은 총무원 소속의 스님이 결제하기로 했다.”
일간지들이 총무원이 조직폭력배를 동원한 사실을 폭로하자 불교계는 물론이고 국민들 사이에서 공분이 일어났다.
4월 5일 서울 대각사에서 혜암 스님 등 원로 11명이 총무원장 사퇴와 전국승려대회 소집을 결의했다. 의현 스님은 원로들의 결의와 승려대회 개최를 금지하라는 종정 서암 스님의 교시로 맞섰다. 10일에는 조계사에서 2500여 명이 참여하는 전국승려대회가 열려 종정 불신임과 총무원장의 멸빈(승가에서 영원히 추방), 개혁회의의 출범을 결의했다.
양측의 대립이 격화될 무렵 범종추에 속한 스님들이 찾아와 협조를 구했다. “바깥 작업(정치권)을 해 주십시오. 지선 스님은 민주당 위주로만 문제를 풀려고 하고… 싸움도 싸움이지만 정치권의 입장도 바꿔야 하는데 그게 어렵습니다.” 나는 “정권의 개입도 큰 문제이지만 핵심은 종단 개혁입니다. 교권 수호로 가야지, 정권투쟁으로 변질돼서는 안 됩니다”라고 응답했다.
4월 12일 김 차관이 개혁회의 지도부와 의견을 나눴다. 13일 오전 1시 경찰이 총무원 청사를 떠난 뒤 오전 6시 의현 스님이 사퇴했다. 권력의 비호가 없는 의현 스님 체제는 이미 빈껍데기였다. 18일 임시종회가 열려 총무원장 불신임과 개혁회의 법 제정, 종회 해산 등을 결의해 개혁회의의 합법적 탄생을 종헌종법으로 뒷받침했다.
이후 개혁을 위한 후속 조치들이 차례로 이어졌지만 YS 정부와의 관계는 소원했다. 종단과 정부의 불편한 관계가 계속되다 7월 YS는 새 종정으로 추대된 월하 스님, 총무원장 탄성 스님을 초청해 유감을 표명했다. 1994년 종단 사태로 60명이 징계됐고, 의현 스님 등 9명이 멸빈됐다.
그해 11월 총무원장 선거를 1개월여 앞둔 시점에 지하 스님이 찾아왔다. 스님은 지선 청화 도법 학담 현응 스님 등 개혁을 이끌었던 그룹에서 나의 총무원장 출마를 지지하기로 의견을 모았다는 것이다. 그때까지만 해도 큰 뜻이 없었기에 이유를 물었다. 지하 스님은 ‘개혁적이다, 행정력이 있다, 법난 때 탄압을 받았다’는 세 가지를 크게 꼽았다. 총무원장 선거에는 공교롭게도 사제 월탄 스님도 출마해 사형사제 간의 대결이 됐다.
11월 21일 나는 총무원장에 당선됐고 23일 원로회의 인준을 받아 제28대 총무원장에 취임했다. 1980년 10·27법난으로 쫓겨난 뒤 14년 만이었다.
<33>회에서 송월주 스님은 본격적으로 종단 개혁에 나섭니다. 우선, 조계종의 ‘1994년 체제’ 중 종단사(史)를 함께 새로 쓴 스님들을 이야기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