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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2/기물명(器物銘)을 찾아서]가려운 곳 긁어주는 여의를 ‘군자의 모습’ 이라 여긴 뜻은

입력 | 2011-12-17 03:00:00


조선시대에 만들어진 철제은상감여의. 불교 법회에서 설법을 하거나 강론을 할 때 승려가 몸에 지녔던 것이다. 곱게 쪼이질 한 표면을 은선으로 장식하는 입사기법으로 꽃과 새 무늬를 표현했다.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 ‘여의(如意)’는 마음먹은 대로 된다는 뜻이다. 마음먹은 대로 늘이기도 하고 줄이기도 하는 손오공의 지팡이가 여의봉(如意棒)이요, 이무기가 용이 되기 위해 꼭 얻어야 하는 것이 여의주(如意珠)이다. 기물명의 세계에서는 이따금 여의침(如意枕)을 소재로 하는 경우도 있다. 이 베개를 베고 자면 자신이 꿈꾸는 세계로 마음대로 갈 수 있고 꿈꾸는 바를 마음대로 누릴 수 있다. 그런데 여의는 그것 자체로 기물의 이름이기도 하다. ‘마음먹은 대로’라는 뜻을 지닌 이 기물은 대체 어떤 물건이었을까. 》
○ 여의란 어떤 물건?

여의치 않은 일 가운데서도 특히 사람을 미치게 하는 것은 가려움일 것이다. 군화를 신고 무좀을 앓는 군인이나 손이 닿지 않는 등짝에 가려움이 생긴 사람을 떠올려 보면 금방 공감이 갈 것이다. 가려운 데를 시원스레 긁을 수만 있다면 그 얼마나 후련하고 통쾌할 것인가! 여의는 바로 이렇게 가려운 데를 긁어주는 기능을 하는 도구였다. 대나무 쇠 옥 뿔 등으로 만든 여의는 지금의 효자손처럼 끝이 꼬부라진 지팡이 모양이 기본적인 생김새였다.

고려시대의 문인 이규보는 여의의 다른 이름인 ‘양화자(痒和子)’란 시에 이렇게 썼다. “가려운 등 긁을 때엔 너무도 즐거우니, 혹은 여의라 하고 혹은 양화라 부르기도 하네. 손가락 모양인데 손보다 편리하여, 손닿기 어려운 곳도 마음대로 긁어주네(背能悅可多 或稱如意或痒和 具人手指超人手 手所難侵輒解爬).” 재상을 지낸 이규보도 가려움만은 참을 수가 없었던 까닭에 이런 시를 짓지 않았을까 싶다. 그는 이어 쓴 시에 “옛 사람들은 나무를 깎아 만들어 그 형체 뾰족뾰족 손가락 같더니, 후세 사람들은 상아로 만들어 그 긁어주는 공(효과)이 섬섬옥수의 두 배는 될 것”이라고 읊었다.

○ 여의, 어떻게 썼을까?

그림 속에 나타난 여의는 설법하는 고승의 손에 들려 있기도 하고, 어떤 때는 사대부의 화병 속에 담겨 있기도 한다. 그 용도도 단지 가려운 데를 긁어주는 것에 그치지 않았던 듯하다. 고승들이 사용한 여의는 위엄을 상징하는 수단이 되기도 했고, ‘청공(淸供·맑고 깨끗한 물품)’의 한 종류로써 사대부가 방 안에 갖추어 두고 싶은 멋진 물건이기도 했으며, 때로는 후려칠 수 있는 매의 역할을 하기도 했다. 중국 진(晋)나라 때 축담유(竺曇猷)란 고승이 산중 석실에서 불경을 외자 호랑이 수십 마리가 와서 경청하였는데 유독 한 마리만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그러자 스님이 여의로 그 호랑이의 머리를 두드리며 “왜 너만 조느냐”고 야단을 쳤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그런가 하면 어떤 사람이 치통을 참다못해 철여의(鐵如意)로 앓던 이를 박살냈다는 웃지못할 해프닝도 있었다. 조선 후기의 문인화가인 이인상과 이윤영이 그림을 감상하다 감탄을 표현할 적에 여의를 두드렸다는 기록도 남아 있다. 이외에 다산 정약용의 유명한 작품인 ‘그 얼마나 통쾌한가(不亦快哉行)’에 나오는 주인공 중 하나가 또한 여의이다. 그는 “장기나 바둑 승부를 알 수가 없어, 곁에서 물끄러미 바보처럼 앉았다가, 한 자루 철여의를 손으로 움켜잡고, 단번에 판 위를 휙 쓸어 없애 버리면, 그 또한 통쾌하지 아니한가!”라고 했다.

○ 여의명(如意銘), 여의를 다루는 마음가짐

단원 김홍도의 ‘포의풍류도(布衣風流圖)’. 화병에 검은색 여의가 꽂혀 있다. 동아일보DB

조선 후기에 이르면 여의는 사대부들의 청공 가품(佳品·질이 좋은 물품)으로 모습을 바꾸어 등장하곤 한다. 사신들이 중국 황제에게 하사받은 품목 중에 여의가 포함돼 있기도 했고 ‘사고전서(四庫全書·청나라 건륭제 때 천하의 모든 서적을 수집하여 해제와 필사로 만든 책)’ 편찬을 담당했던 기윤(紀)이라는 중국 문인이 조선의 홍량호에게 호의의 증표로 준 선물에도 옥여의(玉如意)가 들어 있었다.

‘북학의(北學議)’를 저술했던 박제가도 침향목(沈香木)으로 만든 여의를 아꼈던 듯하다. 그는 영지 모양을 한 침향목 여의를 기려 “땅에 영지가 있음은, 하늘에 구름이 있음과 같다. 꼴을 이뤄 엉기기도 하고, 흩어져 얽히기도 하니, 이는 자연의 무늬로다(地之有芝 猶天之有雲也 或形而凝 或散而 是惟自然之文, 沈香靈芝如意銘)”라고 하였다. 영지처럼 엉겨 있는 여의의 머리 모양을 묘사하면서 자연의 이치와 운치를 엿보았던 것이다.

또한 19세기 문인인 이유원도 대나무 옥 쇠로 만든 세 개의 여의를 소재로 하여 ‘삼여의명(三如意銘)’을 짓기도 했다. 대나무 여의에 대해서는 “대나무는 곧아서 사람에게 쓰인다. 내가 품은 뜻도 너와 함께 하리라(竹之貞 爲人用 人之意 與爾共)”라고 했고 옥으로 만든 여의에 대해서는 “군자의 모습이요 자리의 보배로다. 그 덕이 순수하니 내 곁에 있으라(君子人 席上珍 其德純 不去身)”고 하였다. 마지막으로 쇠로 만든 여의에는 “옥보다 강하고 대보다 굳세다. 너를 붓으로 사용하면 영원히 닳지 않으리라(鋼勝於玉 勁勝於竹 若筆用之 萬年不禿)”고 하였다. 의지 인격 문필이란 사대부에게는 뗄 수 없는 요인들인데, 이유원은 이 세 개의 여의에 자신의 지향을 응축하려 했던 것 같다.

소녀가 되어가는 두 딸아이는 우리 부부의 손을 꼭 잡고 잠들기를 좋아한다. 따뜻하고 보드라운 두 고사리손은 옥으로 만든 손 모양의 여의를 떠올리게 한다. 그럴 때면 그들의 꿈길이 여의침을 벤 것처럼 달콤하고 아늑하며 내일도 다시 그러기를 한 번 더 소망하게 된다.

기물명(器物銘)은 어떤 특정한 기물에 마음을 실어 보내는 문학적 양식이다. 그런 정서적 작용은 먼저 간절한 소망과 진실한 마음이 있어야 일어난다. 아이의 고사리손이든 옥으로 만든 여의든, 그것을 접한 사람의 마음에 진실함과 간절함이 없으면 감동을 자아내지 못하리라.

다가오는 2012년 임진년(壬辰年)은 60년 만에 돌아오는 흑룡(黑龍)의 해라고 한다. 내년에는 나라 안팎으로 굵직한 일들이 수두룩하다. 총선이나 대선을 염두에 두지 않더라도 사람마다 가려운 일이 어디 한두 가지이겠는가? 그렇기에 가려움을 긁어줄 여의가 이 해밑에 절실하게 생각나는 것이다. 흑룡은 하늘을 훨훨 날 수 있는 여의주를 얻기를 바란다. 하지만 그 흑룡이 여의도 함께 얻어 만인의 가려움을 시원하게 긁어줄 수 있다면 그 또한 통쾌하지 않겠는가.

신년여의(新年如意) 만인여의(萬人如意)를 축원하며 오늘로써 기물명 연재를 마친다.

김동준 이화여대 국어국문학과 조교수 djk2146@ewha.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