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미옥 기자 salt@donga.com
1983년 미국 뉴욕 브로드웨이를 방문한 그는 뮤지컬로 만들어진 ‘그리스인 조르바’를 우연히 접했다. 당시 40대 초반이었지만 자유롭고 유쾌한 60대 노인 조르바에게 빠져들었다. 진짜 남자다운 남자 배우로 손꼽히던 앤서니 퀸에게 매력을 느낀 것인지도 모른다.
한국에 돌아온 후 그는 소설 ‘그리스인 조르바’(당시엔 ‘희랍인 조르바’라는 이름으로 출간)를 읽었고, 1964년 앤서니 퀸이 주연을 맡은 영화도 찾아봤다. 그때부터 30년 가까이 그는 조르바를 꿈꿔왔다. “파∼” 하는 웃음만으로도 우리 마음을 찡하게 만드는 국민배우 최불암 씨(70)다.
최 씨는 종합편성TV 채널A의 주말 드라마 ‘천상의 화원 곰배령’에서 무뚝뚝하고 고집 세지만 속정 깊은 아버지 ‘정부식’ 역할을 맡고 있다. 물질이 아닌 자연을 추구하고, 머리보다는 가슴의 속삭임에 따라 사는 정부식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 고민하던 중에 조르바가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그런데 소설 ‘그리스인 조르바’는 젊은 지식인 ‘나’와 60대 중반의 조르바가 함께 크레타 섬에서 탄광사업을 하면서 일어나는 일들을 그린다. 책에만 빠져 살고 여자를 다룰 줄도 모르는 ‘나’와 달리, 조르바는 말과 행동이 거침없고 예순이 넘은 나이에도 여자만 보면 ‘미쳐 날뛰는’ 야성적인 남자다. 정부식과 조르바는 결이 꽤 달라 보였다.
“물론 다르지. 하지만 두 인물을 관통하는 공통점이 있어요. ‘자연인’이라는 거죠. 물질과 이성이 아닌 정신과 본능에 따라 거침없이 사는 자연인. 작은 이익을 위해 머리를 굽실거린다거나 남의 눈치를 보면서 꼼수를 부리지 않는다는 거지. 자본주의 체제가 공고해지면서 최근 오히려 이 같은 사람이 늘고 있잖아요. 사실 정부식을 핑계 대며 내가 조르바처럼 살고 싶은 건지도 모르지요.”
최 씨는 갑자기 ‘그리스인 조르바’ 책을 펴더니 저자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묘비명에 써있는 문구라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아무것도 바라지도, 두려워하지도 않는다. 그래서 나는 자유다.” 그는 “얼마나 멋진 말이냐”며 웃었다. 하지만 최 씨는 자신이 그랬듯, 삶을 어느 정도는 아는 나이가 된 사람만이 이 책의 진정한 의미를 깨달을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그 대신 20대 청춘들에게는 프랑스 희곡 ‘시라노’를 꼭 읽어보라고 권했다. 시라노는 연극을 처음 시작한 청년 최불암의 혼을 뒤흔들어 놓은 주인공이었다.
“학생 시절 ‘시라노’ 무대에 엑스트라로 올랐어요. 그런데 시라노가, 특히 그의 사랑법이 너무 멋있는 거야. 정말 시라노 역할을 하고, 그 뜨겁지만 슬픈 외사랑을 해보고 싶었는데, 못했어요. 희곡을 어찌나 많이 읽었던지 지금까지도 대사 한마디 한마디가 다 기억난다니까. 사실 다른 배우들처럼 사랑 얘기 하는 드라마를 못한 게 좀 아쉽지. 이순재 형님은 나이 들어서도 하던데, 파∼. 하지만 지금은 시라노보다는 조르바를 더 하고 싶어요.”
“훌륭한 한국인 아버지상, 좀 더 넓혀 한국인 남자상을 만들어 보여주는 게 내 역할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나의 조르바는 그 거침없는 자유를 유지하면서도 한국적인 질박함이 더해진 모습이겠지. ‘한국인 정부식’, ‘한국인 조르바’, 아니 ‘한국인 최불암’으로 사람들의 기억 속에 남기 위해 노력할 겁니다. 배우라면 가져야 할 사명이지요.”
■ 최불암 씨의 추천 도서
◇그리스인 조르바/니코스 카잔차키스 지음
현대 그리스 문학을 대표하는 작가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장편소설. 본능에 충실하고 유쾌한 자유인 조르바가 펼치는 영혼의 투쟁을 풍부한 상상력으로 그려냈다. 주인공 조르바는 저자가 자신의 삶에 큰 영향을 끼친 사람으로 꼽는 실존 인물이다.
◇시라노/에드몽 로스탕 지음
이지은 기자 smile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