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조가 피난가던 문… 잘린 성곽은 서글픔 더해
○ 날개 잘린 새
동대문운동장이 사라진 드넓은 터에선 디자인플라자 공사가 한창이다. 운동장을 철거하면서 발굴해낸 수문(水門)의 규모에 새삼 놀란다. 이토록 큰 유적들이 땅 속에 고스란히 묻혀 있었다니. 서울은 그 자체가 역사유적지라는 말이 다시금 생각난다. 어느덧 횡단보도 건너편의 광희문이 눈에 들어온다. 이 성문은 1975년 도성 복원 과정에서 원래 자리에서 남쪽으로 15m 정도 떨어진 지금의 자리로 옮겨졌다. 한쪽 성곽이 잘린 모습은 다른 성문들에서도 여러 번 봐왔지만, 볼 때마다 ‘날개 잘린 새’처럼 가엾어 보이는 마음은 어쩔 수가 없다. 신호가 바뀌고 시원스레 뚫린 7차로 도로를 건넌다. 길을 건너는 많은 사람들은 자신들이 걷고 있는 이 장소에 어떤 아픔이 담겨있는지 조금이라도 알고 있을까.
세간에서는 1396년(태조 5년)에 태어난 이 문을 수구문(水口門)이라 불렀다. 남산에서 내려오는 물줄기가 광희문 근처(지금의 동대문운동장 터)에서 성곽과 만나는 곳에 수문이 있었기 때문이다.
광희문은 위치상 남대문과 동대문 사이에 있긴 하지만 남소문은 아니었다. 남소문은 1457년(세조 3년) 교통의 편의를 위해 남산 위에 추가로 만들어졌다. 남소문은 처음부터 기구한 운명을 안고 태어났다. 음양설에서 손방(巽方:동남쪽)은 왕가의 ‘황천문(皇天門)’이라며 불길하게 여겼기 때문이다. 때마침 세조의 세자였던 의경세자가 왕위를 물려받기도 전에 병사하면서 남소문은 지어진 지 12년 만인 1469년(예종 1년) 굳게 닫혔고 이후 다시는 열리지 않았다. 이 문이 어디에 있었고, 언제 없어졌는지 정확히 알 길이 없다. 마찬가지로 동남쪽에 있었던 탓일까. 광희문은 상여가 나가는 문이라고 해 ‘주검 시(屍)’자를 넣어 시구문(屍軀門)이라고도 불렀다.
○ 가혹한 역사의 목격자
광희문 앞에 섰다. 석축엔 오랜 세월의 흔적에 더해 많은 이들이 긁어내 생긴 듯한 ‘생채기’가 나 있었다. 그마저도 역사라고 품고 있는 광희문의 묵직한 고독이 느껴졌다. 다가가 살짝 건드리기만 해도 참았던 울음을 툭하고 터뜨려 버릴 것만 같은 침묵. 종종 무덤에 놓여 있는 비석이나 석물들을 보면 죽음을 매개로 돌과 인간이 밀접한 유대감을 나누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어떤 이야기를 담고 있는 느낌이랄까. 광희문에선 그런 돌의 깊이가 느껴졌다. 성문의 돌은 편안한 모습으로 내게 말을 건네고 있었다. 금방 끝날 것 같지 않은 긴 이야기를.
이장희 일러스트레이터 www.tthat.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