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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재현 기자의 망연자실]恨, 날것 그대로 입을 열다 객석에 ‘붉은 소름’이 돋는다

입력 | 2011-12-20 03:00:00

◇ 연극 ‘빨간시’ ★★★★




‘빨간시’는 배우 강애심의 연극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치매 걸린 꼬부랑 할매를 연기하던그는 연극 마지막 빨간머리에 립스틱 짙게 바르고 나타나 ‘카츄샤의 노래’를 절창한다.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들의 못다 이룬 꿈을 대신 이뤄주고픈 시심(詩心)을 담아. 극단 고래 제공

마음의 고통은 물과 같다. 고여 있으면 썩고, 흘러넘치면 다른 사람의 마음에 전염된다. 그게 바로 한국인들이 말하는 한(恨)이다. 극단 고래의 창단공연 ‘빨간시’(이해성 작·연출)는 그 한의 드라마다.

연극은 그 한을 3대에 걸친 비극적 가족사에 십자수 형태로 새겨 넣었다. 자신이 일본군 위안부 출신이라는 것을 평생 감추고 살아온 할매 금자(강애심)의 비밀이 그 날줄이라면 권력자들에게 농락당한 것을 폭로하고 자살한 여배우의 유서가 진실임을 알면서도 침묵하는 손자 동주(김동완)의 사연은 씨줄이다.

진실을 말할 수 없어 울화병에 걸린 손자는 가족들에게 패악을 부린다. 주된 대상은 치매에 걸려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할매다. 손자의 가슴에도 할매의 가슴에도 ‘말할 수 없는 비밀’이 가시처럼 걸려 있다. 전자가 가해자의 비밀이라면 후자는 피해자의 비밀이다.

두 개의 비밀은 갑자기 찾아온 죽음에 의해 풀린다. 할매를 데리러 온 저승사자가 착오로 동주를 데려간다. 저승을 관장하는 옥황(최수현)과 염라(유병훈)는 이를 바로잡으려 하는데 동주는 한사코 이승으로 돌아가길 거부한다.

연극은 이후 저승에 있는 동주의 비밀과 이승에 남은 할매의 비밀을 이중 트랙으로 풀어가면서 진행된다. 저승의 트랙이 다소 코믹한 초현실적 화법으로 전개된다면 이승의 트랙은 매우 진중하고 사실적 화법으로 전개된다. 전자가 광대극이라면 후자는 리얼리즘극이다.

연극의 힘은 리얼리즘극에서 뿜어 나온다. 금자 역의 강애심 씨는 경상도 출신 위안부 할매가 빙의했다고 생각될 만큼 리얼리즘 연기의 절정을 보여준다. 극중 15분간 이어지는 그의 나지막한 독백에 관객은 소름이 돋는 체험을 한다. 위안부 할머니들의 증언록에서 채취한 ‘날것’ 그대로의 사연이 주는 충격만큼 강애심 씨의 연기가 감탄스럽기 때문이다.

반면 저승의 광대극은 삐걱거린다. 관객에게 연극적 재미를 안겨주려는 강박관념과 우주론적 ‘개똥철학’이 뒤엉켜서 혼란스럽다. 여기에 극 중간 중간 삽입된 시와 영상 역시 작품 속으로 녹아들지 못하고 따로 노는 느낌이 강하다. 연출의 과욕이다.

하지만 이승과 저승이 다시 합쳐지는 결말부문에선 진한 감동을 살려냈다. 그것은 1대 금자와 3대 동주를 연결시켜 주는 2대 아비 율(신덕호)을 통해서다.

극 후반부에 비로소 존재를 드러내는 율은 피해의 기억과 가해의 기억이 교차하는 십자가다. 위안부 시절 아비가 누군지도 모르고 갖게 된 ‘저주의 씨앗’이지만 금자가 평생에 걸쳐 생살이 찢기는 아픔을 견디며 보듬어온 ‘인고의 진주’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금자가 평생 미워하면서 또 사랑할 수밖에 없었던 그 아들을 남겨두고 저승행을 택하며 남기는 대사, “니는, 하늘이 낸 사람이데이”가 주는 깊은 감동도 여기에 있다.

동주는 자신의 피에 흐르는 그 한의 결정체를 깨닫고 비로소 원혼으로 떠도는 여배우 수연(강소영)을 직시하게 된다. “치유되지 않은 고통은 사라지지 않아. 다른 이의 고통으로 흘러 다니게 돼”라는 옥황의 대사처럼 수연의 한을 풀어주지 못하면 그것이 또 다른 폭력의 연쇄효과로 이어진다는 내면의 깨달음 때문이다.

연극이 끝나고 14일로 1000회를 맞은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촉구하는 수요집회에 참석한 할머니들의 사진과 함께 배우들이 합창하는 ‘수요일에는 빨간 장미를’ 노래가 흘러나온다. 이 연극의 제목이 ‘빨간시’인 이유다.

권재현 기자 confetti@donga.com   

:i: 내년 1월 1일까지 서울 대학로 연극실험실 혜화동1번지. 1만∼2만5000원. 1588-155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