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찬식 수석논설위원
北 ‘예술 주도자’의 마지막 시도
그제 김 위원장이 사망했다는 북한 방송의 보도가 나온 뒤 최 씨가 다시 화제의 인물로 떠오르고 있다. 최 씨는 김 위원장의 사망에 대해 “제가 겪은 일을 생각하면 지금도 분노가 치밀지만 그렇게 갈 줄은 몰랐다”고 말했다. 북한에 억류됐던 8년여의 세월은 최 씨에게 비극 그 자체였겠지만 이 사건은 북한의 문화예술을 파악하는 데 중요한 실마리를 제공한다.
하지만 영화광은 그의 부분적인 얼굴에 불과하다. 김 위원장의 인생역정에서 문화예술 전체가 떼어놓을 수 없는 관계를 맺고 있다. 김 위원장이 정치활동을 시작한 것은 22세 때인 1964년이었다. 처음 맡은 일이 바로 ‘문화예술 지도’였다. 영화뿐 아니라 가극 연극 무용 미술 등 문화예술 전 분야에 걸쳐 ‘주체 예술론’이라는 방향을 제시하고 직접 제작을 지휘했다.
북한을 대표하는 작품인 ‘피바다’는 김 위원장이 1969년 영화로 제작한 데 이어 1971년 가극으로도 만들었다. ‘피바다’와 함께 ‘5대 혁명가극’으로 불리는 ‘꽃 파는 처녀’ ‘당의 참된 딸’ ‘밀림아 이야기하라’ ‘금강산의 노래’도 김 위원장의 작품이다. 모두 아버지 김일성을 미화한 내용이다. 김 위원장은 “이런 작품들을 통해 북한에 문화예술 혁명을 일으켜 자본주의의 낡은 사상적 잔재와 악폐를 청산했다”고 자랑했다. 그에게 문화예술은 김일성에게 충성심을 표현하는 정치적 수단이었다. 그는 마침내 1980년 북한의 공식 후계자로 전면에 등장한다.
정치에 오염된 문화는 자멸한다
북한의 공연예술은 197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한국을 압도했다. ‘피바다 가극단’과 ‘만수대 예술단’은 여러 차례 해외 순회공연을 통해 웅장한 규모와 화려한 기교를 선보였다. 평양대극장과 같은 공연시설도 한국보다 훨씬 앞서 있었다. 북한의 문화예술은 월북한 예술인들의 덕을 톡톡히 봤다. 광복 직후 남한에서 활동하던 현역 문인 160여 명 가운데 120명이 북한으로 향했다. 전체적으로 남한 예술인 중 70%가량이 광복과 6·25전쟁 시기에 북한을 택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들 대부분은 나중에 북한 정권에 의해 숙청당하는 비운을 겪게 되지만 북한의 문화예술은 출발 단계부터 한국을 능가하는 여건을 갖고 있었다.
한국은 북한의 ‘피바다’ 해외 순회공연에 자극받아 1978년 4000석 규모의 세종문화회관을 신축했다. 이후 예술의전당 등 문화 인프라 구축이 본격적으로 이뤄졌다. 최근 한류 열풍을 통해 우리는 문화 분야에서도 불과 30여 년 만에 급속한 성장을 이뤄냈음을 실감할 수 있다. 남북한의 체제 차이가 명암을 가른 결정적 요인이었다. 하지만 우리 문화계 일각에는 아직도 문화를 정치적 도구로 여기는 구태(舊態)가 반복되고 있다. 실제로 영화 문학 등에서 유사한 논란이 벌어졌다. 정치에 오염된 문화는 결국 자멸하고 만다는 역사적 진리를 다시 되새길 필요가 있다.
홍찬식 수석논설위원 chansik@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