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8>토끼의 뿔과 거북의 털을 구하러 다녔소
1998년 11월 서울 조계사 앞 우정로에서 열린 전국승려대회에는 스님 1500여 명이 참석했다. 이들은 총무원 청사를 점거한 정화개혁회의 측 스님들에 대한 중징계와 총무원 청사 반환 등을 요구했다. 불교신문 제공
당시 총무원장 후보는 나와 월탄, 지선, 설조 스님 등이었다. 정화개혁회의의 점거로 선거는 불가능했다. 종단은 16일 봉은사에서 중앙종회를 열어 총무원 청사 즉각 반환을 촉구하고 후보자 전원 사퇴, 전국승려대회를 통한 사태 수습을 결의했다.
불법 점거가 장기화되고 있는 상황에서 나는 종회의장인 법등 스님과 영담, 정휴, 명진 스님을 한 호텔에서 만났다. 이들은 나를 지지하지만 분규 확산을 막고 종단을 지키기 위해서라며 후보에서 사퇴해 달라고 요청했다. 두말없이 그 안을 받아들였다. 그러면서 종헌·종법을 지켜야 한다, 총무원 청사 강점을 풀어야 한다, 사태 수습을 위해 백의종군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다시 원로회의 의장 혜암 스님에게 전화를 걸어 사퇴 사실을 밝혔더니 스님은 “종단을 위해 큰 불사(佛事)를 했다”고 말했다. 이어 ‘후보 사퇴는 개혁을 위해 같은 배를 탄 동지들에 대한 배신’이라며 강력하게 반발하던 학담, 지홍 스님 등을 간곡하게 설득한 뒤 임기가 끝나기 하루 전인 19일 영화사에서 사퇴 기자회견을 가졌다.
나의 사퇴로 정화개혁회의가 존재할 명분 자체가 사라졌지만 총무원 점거는 계속됐다. 3선 저지를 구호로 내세웠지만 목적은 다른 것이었음이 명백해졌다.
이에 앞서 17일경 당시 총무부장 도법 스님을 총무원장 권한대행으로 발령했다. 지하, 지상, 원우, 학담 스님 등 7, 8명에게 대행을 맡을 것을 제안했지만 모두 고사했다. 그 뒤 도법 스님이 찾아왔다.
“의견이 모였습니다. 사태 수습을 위해 제가 권한대행을 맡겠습니다.”(도법 스님)
나는 “한번 해 볼랑가” 했다.
종단 집행부와 중앙종회 등은 30일 서울 조계사 앞 우정로에서 15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승려대회를 개최했다. 종헌·종법 수호, 정화개혁회의의 즉각 해산, 총무원 청사 반환, 종정의 탄핵, 해종 행위자의 중징계를 결의했다. 다시 총무원 반환을 시도했지만 정화개혁회의 측에서 돌과 화염병을 던지는 등 폭력으로 맞서 큰 충돌이 일어났다. 총무원 청사는 시커먼 연기에 휩싸였다.
이 사태를 평화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도 있었다. 우정로 대회를 앞두고 한 호텔에서 총무원 집행부와 정화개혁회의, 본사주지 모임에 소속된 스님 등 3개 그룹이 모여 의견을 나눴다. 난상토론 끝에 합의안이 나와 종정 스님의 재가를 받기 위해 통도사로 향했지만 거부됐다.
국내 언론은 물론이고 외신을 통해서도 보도된 정화개혁회의의 점거는 법원이 퇴거 가처분소송을 받아들인 뒤 12월 23일 경찰이 점거자들을 해산하면서 끝이 났다. 불법 점거당한 뒤 43일 만의 총무원 청사 복귀였다. 외유 중이던 DJ(김대중 대통령)가 귀국한 뒤 폭력이 난무한 조계종 사태와 관련해 “청와대 앞에서 무슨 꼴이냐”며 화를 크게 냈다는 얘기도 들렸다.
후보 사퇴 기자회견은 어제의 일처럼 생생하다.
“덕이 출중하고 지혜가 뛰어났으면 사태를 원만하게 수습했을 것인데 그러지 못했다. 역량이 부족한 탓 아니겠는가. 수행자들의 싸움과 다툼이 안타깝다. 나의 사퇴로 종단이 빨리 안정되기를 바란다.”
어처구니없어 맞서고 싶지 않아도 싸움에 말려들 때가 있다. 1998년 종단사태 때가 그랬다. 종단개혁의 후퇴를 눈 뜨고 보고만 있을 수 없었다. 개혁의 대의(大義)는 가까스로 구했지만 국민 앞에 모두가 패자(敗者)가 됐다. 유일한 소득은 비폭력과 민주주의적 제도가 얼마나 소중한가를 뼈저리게 느끼게 됐다는 것이다.
정리=김갑식 기자 dunanworld@donga.com
<37> 회에서 송월주 스님은 혜암 스님 종정 추대와 고산, 정대 스님의 총무원장 선출에 얽힌 사연을 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