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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프리즘/허승호]중상주의적 사고에 갇혀있는 사람들

입력 | 2011-12-22 03:00:00


허승호 편집국 부국장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반대 이유는 다양하지만 그중 하나는 ‘한-칠레, 한-유럽연합(EU) FTA가 발효된 후 우리가 칠레와 EU에 대해 무역수지 적자를 봤다’는 것이다. 일반인만이 아니다. 스스로 경제전문가라면서 이렇게 얘기하는 사람이 많다. 이들은 FTA에 대해, 교역에 대해, 그리고 무역수지의 개념에 대해 근원적인 오해를 하고 있다.

‘무역적자’라는 말은 무슨 손해를 본 것 같은 느낌을 주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무역적자 걱정돼 FTA 반대한다고?

갑과 을, 둘이 교역할 경우 갑의 수출은 을의 수입이다. 한-칠레 FTA로 한국에 무역흑자가 기대된다면 칠레엔 딱 그만큼 적자가 생긴다는 뜻이다. 따라서 ‘교역의 목적은 무역흑자에 있으며 무역적자는 손해 보는 일’이라고 전제한다면 양자의 자발적 합의에 의한 교역이나 FTA는 불가능하다. 또 그런 전제라면 한국은 중국 미국과만 교역해야 하며 쿠웨이트 일본과는 거래를 끊어야 한다. 과연 쿠웨이트와의 교역에서 우리는 손해 보는가? 이런 괴상한 결론에 이르는 것은 전제가 틀렸기 때문이다.

교역대상을 특정국이 아닌 전 세계로 넓혀 생각해보자. 한국 전체의 무역수지 흑자는 좋은 것이고 적자는 나쁜 것일까. 그 또한 아니다. 고도성장을 누리던 1970∼90년대 우리는 만성적으로 경상수지가 적자상태였다. 왜 그럴까. 당시 급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기업 투자가 활발한 덕분이었다. 총저축보다 훨씬 많이 투자했고 이를 위해 외국자본을 들여왔다. 즉 자본수지 흑자였다. 그러면 ‘경상수지+자본수지≡0’이라는 회계학적 항등식에 따라 경상수지는 적자가 된다. 왕성한 투자로 인해 적자를 기록한 것이다.

이론적으로는 이렇다. 환율이 오르면 수출이 는다. 그래서 정부는 경상수지 방어가 필요할 때 환율을 올리곤 한다. 그러나 이것은 ‘짧은 경제학’의 시계(視界)에서 맞는 얘기다. ‘긴 경제학’에서의 경로는 거꾸로다. ①국내 투자와 저축의 차액만큼 자본수지가 결정되고 ②항등식 ‘경상수지+자본수지≡0’에 따라 ±부호가 바뀌어 경상수지가 결정되며 ③그 같은 경상수지를 발생시키는 수준에서 균형환율이 정해진다. 예컨대 국민의 저축성향이 높아 투자 이상의 저축을 하는 일본의 경우 자본 순유출이 일어나며(해외투자 및 해외부동산 구입으로 나타난다) 그 액수만큼 경상수지 흑자를 내고 그에 맞는 엔화 환율이 정해진다.

좋은 일자리, 소득, 성장률, 물가 등은 경제의 건전성을 판단하는 핵심지표다. 그러나 무역수지에서는 한국의 적자나 일본의 흑자에서 보듯 우월한 무엇이 있는 것이 아니다. 적정한 외환보유액과 대외지불능력을 확보하는 수준에서 ‘균형’을 유지하는 게 최선이다. 물론 외환관리에 실패해 경상적자가 쌓이고 지불능력이 고갈된다면 큰일이지만 이는 통상정책과는 차원이 다른 별개 문제다.

통상의 목적은 ‘국민 삶의 질’ 향상

무역흑자가 아니라면 교역을 하고 FTA를 하는 궁극적 목적은 뭘까. ①국제분업 시스템을 활용해 ②전체 경제의 생산성을 올려 ③일자리와 소득을 늘리고 소비수준을 높임으로써 ④국민 삶의 질을 향상시키자는 것이다. 이게 진짜다.

한때 해외의 금을 가져오는 것(무역흑자)이 무역의 목적이라고 본 중상주의 시대가 있었다. 200년 전까지의 일이다. 이제 경제원론을 올바로 배운 학생이라면 그런 생각은 낡고 틀렸으며 몹시 위험하다는 것을 잘 안다. 자칫 환율전쟁을 일으켜 공멸로 이끌기 때문이다. 또 하나. 이런 오해가 여전한 데는 ‘FTA 하면 무역흑자가 발생하는 양, 그게 참 좋은 일인 양’ 홍보해 온 정부와 관변연구소의 책임도 매우 크다. 그대로 받아쓴 언론도 마찬가지다.

한미 FTA는 비준까지 끝났다. 그러나 무역수지에 대한 몰이해는 계속되고 있기 때문에 이 글을 쓰는 것이다. “무역적자 때문에 FTA에 반대한다”는 ‘이른바 전문가’들이여, 교과서를 다시 한 번 펼쳐보시라.

허승호 편집국 부국장 tigera@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