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9> 토끼의 뿔과 거북의 털을 구하러 다녔소
법전스님과 담소를 나누고 있는 생전의 혜암스님(오른쪽). 법전 스님은 2001년 혜암 스님이 입적한 뒤 종정으로 추대됐다. 동아일보DB
혜암 스님은 종단 사태로 월하 스님이 불신임된 뒤 1999년 4월 제10대 종정으로 추대됐다.
깡마른 체격에 단호한 눈빛을 지닌 혜암 스님은 출가 후 평생 참선에 전념해온 선승(禪僧)이다. 1946년 경남 합천 해인사에서 인곡 스님을 은사로 출가했고 효봉 스님을 계사로 비구계를 받았다.
깨달음을 주제로 혜암 스님과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내가 “깨달으셨냐”고 묻자 스님은 “수행으로 유명한 도인 스님(금오 스님)으로부터 공부를 잘하고 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고만 했다. 종단을 대표하는 선승이지만 함부로 깨달음에 대해 언급하지 않던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혜암 스님은 다른 선승들과 달리 종단이 위기에 빠지자 일신의 안일(安逸)을 접은 채 산중을 나섰다. 1994년 총무원장 의현 스님 측과 ‘범종단개혁추진위원회’(범종추)가 대립하고 있을 때에도 종단개혁에 동참했다. 스님은 원로 의원들과 서울 대각사에서 모임을 열고 의현 스님의 3선이 이뤄진 종회 무효화, 총무원장 즉각 사퇴, 전국승려대회 소집 결의 등을 주도했다. 이후 단식 정진하며 산속에서 수행하던 수좌들의 개혁 참여를 이끌어냈다. 스님은 1998년 정화개혁회의의 청사 점거와 폭력 사태 속에서도 원로회의 의장으로 종헌, 종법의 수호를 위해 앞장섰다.
두 차례 종단 사태의 극심한 대립 속에서 원로 스님을 대표하는 상징적 존재였던 혜암 스님의 거취가 무엇보다 중요했다. 만약 스님이 그때 다른 입장을 취했다면 종단이 어디로 갔을지 실로 예측하기 어렵다.
스님은 중요한 고비마다 빠르게 결단을 내렸고, 일단 결정하면 단호했다.
평소 몸이 약했던 스님은 2001년 12월 31일 해인사 원당암에서 입적했다. 종단 개혁을 되돌리려는 세력에 맞선 스님의 사자후(獅子吼)가 귓가에 생생하다.
이에 앞서 언급했지만 월하 스님과의 좋은 인연은 종단 사태를 겪으면서 악연으로 치달았다.
스님은 한국 근대불교의 고승인 경봉, 구하 스님의 법통을 이어받고 불보사찰인 통도사를 60여 년간 지켰다. 선교(禪敎)를 겸비했고 80세가 넘어서도 방청소와 빨래를 직접 하고 대중과 함께 공양하고, 경내 청소 등 울력(공동 일)에도 빠지지 않았다.
스님은 정화운동과 종단개혁 과정에서도 큰 역할을 했다. 1950년대 효봉 청담 인곡 경산 스님과 사찰정화수습대책위원회에 참가했고, 1979년 조계사와 개운사 측이 갈등할 때는 총무원장으로 분규 종식에 기여했다. 1994년에는 의현 스님의 3선을 반대하는 개혁회를 적극 지지했다.
종단 사태 이후 왕래가 없었다. 그러면서 세월은 속절없이 흘렀다. 2003년 12월 덕명 스님이 입적하자 조문하기 위해 범어사를 찾았다. 돌아오는 길에 건강이 좋지 않던 월하 스님의 문병을 가겠다고 마음먹고 떠난 길이었다. 조문한 뒤 통도사로 향했는데 도착하니 월하 스님의 장례를 위한 상청이 차려지고 있었다. 문병길이 조문길이 돼 버렸다. 월파 스님, 초우 스님, 경우 스님, 정우 스님 등 문도들을 만나 조의를 표했다.
피차 무슨 허물을 말하랴. 다만 남은 것은 인지상정(人之常情)이다.
정리=김갑식 기자 dunanworld@donga.com
<38>회에서 송월주 스님은 종단 사태의 수습 과정과 고산, 정대 스님이 잇따라 선출된 총무원장 선거를 둘러싼 종단 안팎의 사연을 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