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농사꾼’으로 살게 해주신 5대조 할아버지
일러스트레이션 김수진 기자 soojin@donga.com
의식이 돋을 대여섯 살 때부터, 그리고 건물 주변에서 군불을 때며 심부름하던 일고여덟 살 때부터 이제까지 열화당 공간을 속속들이 살펴 왔기에 남달리 그 공간의 냄새를 짙게 느낀다. 백부이신 경미(鏡湄)께서는 어린 내게 열화당 아궁이에 군불 때는 일을 자주 시키셨는데 이제 와 생각하니 그 일을 시킨 게 예사롭지 않다.
1971년 이 이름을 따 서울에서 현대식 출판사를 차렸다. 오은 할아버지께서 뜻깊은 공간을 설립하신 지 150여 년 만이었다. 강릉 열화당의 역사까지 포함해 2015년이면 꼭 200년이 된다.
2004년 파주에 열화당 새 건물을 마련했다. 출판계가 뜻을 모아 세운 출판도시에 자리 잡았다. 새 열화당 건물을 영국 목수에게 맡기고 ‘도서관 도시’라는 출판도시의 지향점에 걸맞은 공간을 건물에 도입하도록 주문했다. 건축가는 주문대로 ‘도서관+책방’이라는 복합공간을 설계하고자 애썼다. 내가 구상한 공간은 평생을 모아 온 나의 소장본과 열화당 편집부 장서 및 자료를 선별해 소장함으로써 나를 비롯한 열화당 직원들은 물론이고 출판도시에서 일하는 모든 이에게, 더 넓게는 이곳을 찾는 방문객들이 도서관처럼 열람할 수 있게 하며, 소유하고 싶은 책이 있으면 살 수 있는 책방이 되기도 한다. 다만 도서관이기도 하므로, 재구매가 가능해 다시 채워 넣을 수 있는 책만 판매가 가능하다. 이 공간은 나의 공부방이자 편집부의 자료실이자 출판도시 모든 이들의 서점이요, 도서관이다. 책이 자칫 경직되거나 상업주의에 매몰될 수 있음을 경계하는 개념이다.
이 공간 한쪽에 벽감(壁龕)을 마련하고 오늘의 우리를 있게 한 사람들을 모셨다. 사진으로 기억될 수 있도록 선교장 사람들의 작은 얼굴사진 액자를 진열해 놓았고, 다른 한쪽에는 오늘의 열화당을 있게 한 책의 저자들 얼굴사진 액자를 진열해 놓았다. 모두가 고인이므로 이 공간을 찾는 이들은 특별한 느낌으로 책을 생각하게 된다. 책을 다루는 모든 이에게 남다른 소명의 생각을 일깨운다. 이곳을 찾는 이로 하여금 따뜻한 대화가 가능케 한다.
강릉 열화당에서 서울 열화당을 거쳐 파주 열화당에 이르는 시공간의 이동 축은 매우 길어 보이지만 오은 할아버지의 입김이 이 공간에 서려 있다. 200년 전의 열화당이 지금 파주에 와 있으며, 오늘 열화당 발행인이란 직분은 오은 할아버지가 내리신 벼슬이다.
이기웅 출판도시문화재단 이사장·열화당 발행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