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0>토끼의 뿔과 거북의 털을 구하러 다녔소
2001년 조계종 총무원장이던 정대 스님(오른쪽에서 두 번째)이 부처님 오신 날을 맞아 종단을 방문한 3당 대표들과 인사를 나누고 있다. 동아일보DB
당시 종단 내에는 범종추에 이어 종단의 핵심을 담당한 개혁그룹 외에도 다양한 집단이 존재했다. 우선 스승을 중심으로 문도가 형성되는 우리 불교의 오랜 전통에 따라 여러 문중(門中)이 있다. 여기에 바깥 사회의 행정부라고 할 수 있는 총무원과 이를 견제하는 국회 격인 중앙종회, 종단 원로들의 모임인 원로회의, 각 지역에는 25개 교구의 본사 주지들이 있었다.
종단사를 보면 우여곡절이 있지만 94년을 기점으로 총무원장 중심제가 정착된다. 이를 뒤집으려고 한 것이 98년 종단사태의 본질이다. 이후 종정(宗正)은 종단의 법통을 잇는 상징적 존재로 남게 된다. 총무원장이 사실상 종단을 이끌기 때문에 종단 내 여러 그룹은 자신의 정책을 반영하기 위해 선거에 큰 힘을 쏟는다. 세속정치와 비슷하다는 비판도 있겠지만 오랜 시행착오를 거쳐 정착된 시스템이다. 불교를 포함한 모든 종교에서 1인에게 힘이 집중됐을 때 생기는 폐해는 두말할 나위가 없다.
한쪽에서는 지선 스님이 종권을 잡아야 진정한 개혁이고, 개혁완수가 가능하다고 주장했지만 대다수는 고산 스님을 선택한 것이다. 율사이자 강사로 명성이 높은 고산 스님은 개혁종단에서 호계원장을 지냈다. 고산 스님은 나를 지지했던 개혁그룹 주류와 문중, 본사 주지 등 다양한 그룹으로부터 폭넓은 지지를 받았다.
당시는 김대중(DJ) 대통령 시절이었다. 일각에서는 지선 스님이 전남 장성 백양사 주지를 지낸 데다 DJ 측근과 가깝다며 유리할 것으로 보는 시각도 있었다.
그렇지만 나는 정치권력은 선거에 영향을 끼치지 못했다고 본다. 94년 이후 종단의 자주성이 강화됐고 8년간 권력에 의지했던 의현 스님 체제의 폐해가 너무 컸기 때문이다. 표가 고산 스님 쪽으로 몰린 것은 상대적으로 젊은 지선 스님보다는 고산 스님의 경륜과 안정감이 신뢰감을 줬기 때문이다.
1999년 1월 취임한 고산 스님은 “종단 안정과 개혁을 바라는 전 종도와 사부대중이 역할을 준 것으로 받아들이겠다”며 “원로 대덕 중진스님들의 공의를 결집해 하루속히 종단을 정상화하는 데 진력하겠다”고 밝혔다. 그 뒤 4월 혜암 스님을 종정으로 추대하고 9월에는 총무원 청사 신축 등 조계사 성역화 불사에 본격적으로 착수했다.
이에 종단은 종단의 자주성을 유린하는 부당한 판결이라며 조계사에서 1만20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불교자주권과 법통수호를 위한 사부대중 궐기대회’를 개최했다. 종단 외곽에 있던 정화개혁회의 측은 종권 인수를 이유로 조계사 진입을 시도하기도 했다.
결국 종단은 시비를 피하기 위해 다시 선거를 치러야 했다. 그해 11월 15일 치러진 선거에서는 정대 스님이 재적 반수가 넘는 166표를 얻어 지선 스님을 32표 차로 누르고 당선됐다. 정대 스님은 11월 23일 제30대 총무원장으로 취임했다.
정리=김갑식 기자 dunanworld@donga.com
<39>회에서 송월주 스님은 ‘자다가 총무원장 됐다’는 정대 스님 당선에 얽힌 사연을 얘기합니다. 정대 스님은 스스로 ‘창종(創宗) 이래 정치중 1번’이라고 자처하기도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