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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횡설수설/정성희]기억 제거

입력 | 2011-12-26 03:00:00


치매에 걸린 사람들은 관계가 먼 사람들부터 기억에서 지우기 시작한다. 며느리보다는 아들을 더 오래 기억한다. TV드라마 ‘천일의 약속’에서 치매에 걸린 여주인공은 증세가 심해지면서 남동생은 기억하지만 남편을 ‘아저씨’라고 부른다. 기억력이 좋으면 시험에서 탁월한 성적을 올릴 수 있으니 좋겠지만 기억력이 항상 축복은 아니다. 솔로몬 셰라셰프스키라는 옛 소련 사람은 한 번 본 장면을 잊지 않는 비상한 기억력을 갖고 있었지만 사람을 잘 알아보지 못했다. 볼 때마다 표정에 차이가 있어 동일인인 줄 몰랐던 것이다.

▷우위썬(吳宇森) 감독의 액션과 작가 필립 K 딕의 기발한 상상력이 만든 할리우드 영화 ‘페이첵’은 한 사악한 회사가 미래를 보는 기계를 발명한 천재 엔지니어(벤 애플렉 분)의 최근 2년간 기억을 지우는 것으로 시작한다. 특수 장비를 이용해 특정 기억이 담긴 세포를 하나하나 파괴하는 식으로 없애 버린다. 영화 ‘이터널 선샤인’에는 아픈 기억만 골라 없애 주는 회사가 등장한다. 회사 이름은 라쿠나(lacuna). 라쿤(lacune)은 의학용어로 혈관이 막혀 생기는 뇌 손상 부위를 말한다. 이런 부위가 많아질수록 기억력이 떨어진다.

▷국내 연구진이 전기충격으로 기억을 제거하는 메커니즘을 밝혀내 권위 있는 학술지 ‘네이처 뉴로사이언스’ 인터넷판에 게재했다.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 연구진은 실험용 쥐의 뇌에서 PLCβ4라는 특정 유전자와 전기신호가 공포에 대한 기억을 지우는 데 관여한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단발성 전기신호가 뇌의 특정 부위에 전달되면 “관련 기억을 지우라”는 명령을 내린다는 것이다. 연구가 더 진행되면 끔찍한 일을 당했을 때의 고통을 잊지 못하는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PTSD)’ 환자를 치료할 수 있는 길이 열린다.

▷망년회(忘年會) 시즌이다. 한 해를 아름답게 마무리하자는 의미도 있지만 불쾌한 기억, 아픈 상처를 잊어버리자는 의미도 들어 있다. 하지만 폭음(暴飮)은 불쾌했던 기억을 잊게 해주기는커녕 지난밤 기억의 필름을 끊어놓을 뿐이다. 신기술의 힘을 빌리지 않더라도 뇌는 불쾌한 기억을 지우는 자동 삭제 기능을 어느 정도 갖고 있다. 그래서 망각(忘却)이 신의 선물이라는 말도 있다.

정성희 논설위원 shchu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