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위썬(吳宇森) 감독의 액션과 작가 필립 K 딕의 기발한 상상력이 만든 할리우드 영화 ‘페이첵’은 한 사악한 회사가 미래를 보는 기계를 발명한 천재 엔지니어(벤 애플렉 분)의 최근 2년간 기억을 지우는 것으로 시작한다. 특수 장비를 이용해 특정 기억이 담긴 세포를 하나하나 파괴하는 식으로 없애 버린다. 영화 ‘이터널 선샤인’에는 아픈 기억만 골라 없애 주는 회사가 등장한다. 회사 이름은 라쿠나(lacuna). 라쿤(lacune)은 의학용어로 혈관이 막혀 생기는 뇌 손상 부위를 말한다. 이런 부위가 많아질수록 기억력이 떨어진다.
▷국내 연구진이 전기충격으로 기억을 제거하는 메커니즘을 밝혀내 권위 있는 학술지 ‘네이처 뉴로사이언스’ 인터넷판에 게재했다.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 연구진은 실험용 쥐의 뇌에서 PLCβ4라는 특정 유전자와 전기신호가 공포에 대한 기억을 지우는 데 관여한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단발성 전기신호가 뇌의 특정 부위에 전달되면 “관련 기억을 지우라”는 명령을 내린다는 것이다. 연구가 더 진행되면 끔찍한 일을 당했을 때의 고통을 잊지 못하는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PTSD)’ 환자를 치료할 수 있는 길이 열린다.
정성희 논설위원 shchu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