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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삶 나의 길/송월주 회고록]무너진 ‘불교판 DJP 연합’

입력 | 2011-12-26 03:00:00

<181>토끼의 뿔과 거북의 털을 구하러 다녔소




2001년 김대중 대통령이 종교계 인사를 초청한 모임에서 조계종 총무원장 정대 스님(오른쪽)과 인사를 나누고 있다. 김 대통령은 정대 스님에게 함께 임기를 마치자고 할 정도로 가깝게 지냈다. 동아일보DB

역대 총무원장 선거 중 1999년 11월 치러진 제30대 총무원장 선거만큼 우여곡절이 많은 경우는 드물었다. 앞서 고산 스님이 제29대 총무원장으로 선출됐지만 선거 공고 절차를 제대로 이행하지 못했다는 법원의 판결로 다시 선거를 치러야 했다.

선거는 지난번처럼 고산 스님과 지선 스님의 경합 구도가 됐다. 그러나 뜻밖의 변수가 생겼다. 나를 지지해온 개혁그룹 주류의 지지를 받아온 고산 스님이 “상좌뻘인 사람(지선 스님)과 경쟁하지 않겠다”며 불출마를 고집한 것이다. 고산 스님은 탄성, 월서 스님과 상좌인 영담 스님의 간곡한 설득도 뿌리치고 급기야 지방으로 내려가 버렸다.

고산 스님을 추대하려던 지지자들은 ‘장수’를 잃은 난처한 입장에 빠졌다. 게다가 지난 선거에서 진 지선 스님 그룹은 총무원장과 동국학원 이사장을 지낸 녹원 스님을 따르던 이른바 ‘직지사단’과 제휴했다. 녹원 스님이 경북 김천시 직지사를 근거로 활동했기 때문에 붙은 이름이다. 직지사단에는 법등 정휴 종광 스님 등이 있었고 정대 법장 스님도 가까운 관계였다. 종단 내부의 이념적 지형도에서 볼 때 진보적인 지선 스님 그룹과 가장 보수적인 세력이 종권(宗權)을 위해 결합했다는 의미에서 ‘불교판 DJP 연합’이라고도 불렸다. 정대 스님도 지선 스님 캠프에서 역할을 맡아 선거는 이미 끝났다는 말까지 나왔다.

그러나 개혁그룹 주류는 지선 스님 지지자들이 종권을 잡을 경우 그 성향을 감안할 때 종단 전체가 흔들릴 수 있다고 판단했다.

후보등록 마감이 코앞으로 다가온 시점에 정대 스님이 아침 공양 무렵 영화사로 찾아왔다. 전날 저녁 개혁그룹 주류 쪽에서 만나러 왔다는 것이다.

“간밤에 여럿이 와서 저를 후보로 추대하겠다고 하네요. 그래서 답을 미루고 영화사 회주 스님 말씀을 들고 결정하겠다고 했습니다. 스님 생각은 어떠신지요?”(정대 스님)

나는 “할 때가 되셨죠”라고 답했다.

그 뒤 지선 스님 쪽으로 기울었던 선거 분위기가 확 바뀌었다. 정대 스님이 출마하는 바람에 불교판 DJP 연합은 무너졌고, 나름의 세가 있었던 법장 스님도 정대 스님을 지지했다. 개표 결과 정대 스님이 재적 과반수인 166표를 얻어 경쟁자인 지선 스님을 32표 차로 누르고 당선됐다. 정대 스님이 ‘자다가 총무원장이 됐다’고 하는 사연의 전말이다.

현 총무원장 자승 스님의 은사인 정대 스님은 승가대 이전과 현재의 총무원이 있는 불교역사문화기념관 불사(佛事) 등 종단 발전을 위해 적잖은 업적을 남겼다. 정대 스님은 25세의 비교적 늦은 나이에 출가해 총무원 간부직을 두루 지냈고, 종회 의원을 일곱 차례나 하는 등 종단 행정에 밝았다.

스님은 격식과 체면에 얽매이지 않는 편으로, 총무원장 재임 때 민감한 정치적 발언으로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2001년 1월에는 당시 한나라당 이회창 총재에 대해 “그 사람이 집권하면 단군 이래 희대의 보복정치가 난무하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다”고 말해 종단 안팎을 벌컥 뒤집어 놓았다. 그 뒤 내가 이 얘기를 화제로 꺼내려 하자 정대 스님은 먼저 “진의가 왜곡됐다”며 길게 해명하면서 내 말문을 막기도 했다.

불교역사문화기념관 불사에 관한 정대 스님의 원력(願力)은 대단했다. 옛 청사는 몇 차례의 폭력적인 종단 분규를 겪으면서 ‘흉가’의 이미지가 크게 남아 새로운 불사가 필요하다는 의견이 많았다. 이 계획은 내가 총무원장으로 있을 때 불교박물관으로 시작해 정대 스님이 건축에 필요한 재원을 확보한 뒤 나중에 지관 스님이 총무원장으로 있을 때 불교역사문화기념관으로 완공됐다.

종단 행정을 염두에 둔 스님의 대외적 행보는 논란이 많았지만 넉넉한 인간미에 관해서는 시비가 없었다. 총무원장이 되고 난 뒤 과거 자신의 반대편에 있던 사람들마저 품을 정도로 인간관계의 그릇이 넓었다. 정대 스님은 젊은 시절 건강을 해친 탓에 2003년 66세의 아까운 나이에 입적했다. 그렇지 않았다면 종단 발전을 위해 더 큰 일을 할 수 있었을 것이다.

1994년 이후 종단개혁을 둘러싼 허물을 털어놓았다. 이는 남 탓이 아니라 종단개혁의 인과(因果)를 밝히기 위함이다. 지금의 종단 역시 한순간이 아니라 오랜 노력과 갈등 속에 이뤄진 것이다. 남에 대한 ‘허물 타령’으로 시간을 축내는 것만큼 부질없는 일도 없다. 이제 공심(空心)으로 돌아가 불교 발전을 위해 서로 머리를 맞대야 할 때다.

정리=김갑식 기자 dunanworld@donga.com   

<40>회에서 송월주 스님은 출가에 얽힌 사연을 이야기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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