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당종업원으로, 엄마로, 詩人으로… 최연숙 씨의 세 이름
15년을 식당에서 고된 일을 하면서도 ‘시’로 삶의 넋두리를 노래한 최연숙 씨. 가난과 엄마라는 신분 때문에 포기했던 꿈을 이룰 수 있게 됐다며 크게 웃고 있다. 수원=최예나 기자 yena@donga.com
“쏴…”
옆 칸에서 화장실 변기 물 내리는 소리가 시상을 깬다. 》
그래도 몇 분 동안 짜릿한 행복을 맛봤으니…. 15년째 식당 서빙 일을 하는 최연숙 씨(54·여)는 자신만의 ‘둥지’를 나선다.
“허리 나이가 일흔이시네요. 조심하셔야 합니다.”
의사가 말했다. 지난해 봄이었다. 손목, 발바닥부터 시작해 아픈 곳이 점점 늘었다. 그럴 법도 했다. 기계도 오래 쓰면 고장이 잦다는데…. 151cm 작은 키에 몸무게 46kg. 지금까지 버텨준 것만으로도 고마울 뿐이다.
그래도 요즘 연숙 씨는 설렘을 주체할 수 없다. 가난해서, 엄마여서 빛이 바랬던 꿈들. 그 꿈이 현실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 가난해서…
흰 쌀밥이나 예쁜 옷은 가질 수가 없어 아쉬웠다. 하지만 꿈은 생각만으로도 즐거워지는, 참 신기한 것이었다. 초등학교 때 연숙 씨는 선생님이 되고 싶었다. 할 수 있는 건 딱 한 가지뿐이었다. 공부를 아주, 아주 잘하는 것. 연숙 씨는 곧잘 1등을 했다.
하지만 열심히 공부하면 나중에 교육대학에 보내주겠다던 아버지는 늘 술에 절어 있었다. “중학교에 갈 수 있도록 입학금만 빌려 달라”고 울면서 친척집을 돌았다. 하지만 다들 가난했다.
1973년 1월에는 구로공단 직물공장에 들어갔다. 파란 작업복에 파란 스카프 차림의 소녀들은 ‘수출의 노래’를 부르며 교육을 받았다. 머리를 단발로 자르려는 교육관의 손길을 피하면 가차 없이 따귀를 때렸다.
그해 6월에 건너간 삼성산요는 구로공단에 비해선 편한 곳이었다. 하루 16시간 노동이야 다를 바 없었지만, 좋은 게 하나 있었다. 책이 있다는 것. 연숙 씨는 ‘죄와 벌’ ‘나목’ ‘인간의 굴레’ 등 기숙사의 작은 서고에 있는 책 400여 권을 밤마다 이불 속에서 플래시를 켜고 읽었다. 이때부터 누런 노트에 시(詩)와 일기를 끼적이기 시작했다. 시인이 될 수 있다는 생각에 선생님이 되려는 꿈을 접어야 했던 아픔이 아무는 듯했다.
○ 엄마여서…
결혼을 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남편이란 그저 술 마시면 밥상이나 엎고 돈 생기면 노름이나 하는 한심한 인물이었다. 하지만 운명을 막을 수는 없는 걸까? 네 살 어린 그는 참 끈질겼다. “차 한 잔 하실래요?”라며 접근할 때는 꿈쩍도 않았다. 그는 “당신이 좋다” “결혼하자” “나랑 결혼 안 해주면 죽겠다”며 끊임없이 도전해 왔다. 결국 사랑받지 못하고 자란 연숙 씨가 무장해제당했다. 1986년 혼인신고만 하고 결혼 생활을 했다.
국제통화기금(IMF) 된서리를 맞고 생계가 어려워지자 남편은 집에 들어오지 않았다. 다음해 연숙 씨는 남편과 이혼을 했다. 9월이었다. 결혼기념일은 잊어버렸지만, 이혼한 달만큼은 똑똑히 기억한다.
그때부터 연숙 씨의 목표는 오로지 ‘엄마’ 역할을 충실히 하는 것이었다. 두 아들을 굶기지 않고 학교에 보내야 했다. 내 부모는 못했지만 나만은 최소한 자식들 고등학교는 졸업시키겠다고 마음먹었다.
본격적으로 식당에 나갔다. 그날그날 파출부 업체에서 소개받은 곳에 갔다. 아이들 학교에 보내고 해장국집에서 오전 9시부터 오후 9시까지. 돈이 급할 때는 고깃집으로 옮겨 오후 10시부터 꼬박 12시간을 더 일했다.
식당 일은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출근하자마자 청소하고 야채 쌈장 등을 접시에 담으며 점심 준비를 하면 손님이 몰려오기 시작한다. 한바탕 설거지를 끝내면 또 저녁 준비. 화장실 갈 때를 제외하고는 다른 생각을 할 수조차 없다. 일당은 3만 원. 지금이야 6만 원으로 올랐지만, 그때는 하루 벌어 하루 먹기도 벅찬 돈이었다.
꿈을 꿀 수 있다는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시간들이었다. 시는 밤에 돌아와 빨래를 다릴 때나 쌓인 설거지를 하면서 중얼거리는 넋두리였다. 물새는 지하방, 빨래, 찬밥 등 연숙 씨를 둘러싼 일상이 시의 단골 소재가 됐다.
처음에 그들은 현관문 앞에 모여서
돌쩌귀에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장마가 오기 전부터 신발들을 띄워 올렸다
거실로 들어와
예수님처럼 물 위를 걷게 하더니
지금은 잠자는 내 등짝 밑에
몸을 펼치고 누워 있다
뒤 베란다 타일 위에도
욕실로 오르는 계단에서도
눈물처럼 찰박거린다
옥탑방의 바람을 피해 스며든
반지하 내 집에는 나보다 먼저
물이 와서 살고 있었다
(동거)
○ 시(詩)
생활을 쓴 시는 생활로 돌아왔다. 대회에서 입상하거나 공모전에 채택돼 때로는 상금으로, 때로는 냉장고 같은 가전제품으로 왔다. 삶이 고단하고 퍽퍽해서 쓴 시는 다시금 삶을 이어나가게 하는 힘이 돼 줬다. 그 가운데 2008년 제9회 동서커피문학상 시 부문에서 동상을 받은 작품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텅 빈 봄
안개 넘어 한 줄기
기다림의 빛을 끌어당기며
오늘 코스모스를 심는다
더디게 이파리들 키워
꿈이 되지 못한 커다란 생명들
위로처럼 왔다가고
지글거리는 한낮을 숨죽여
우주의 시계가 세 시쯤 되면
가는 목 세워 바라볼 하늘에
둥글고 빛나는 그것과
눈 맞출 수 있어야 한다
뚫린 가슴에
젖은 바람 둥지 틀 무렵이면
작은 저것 어쩌면 제 몸만큼
작은 내일로 피겠지
기다림으로 피겠지
(봄날, 코스모스를 심다)
연숙 씨는 그 전해 봄, 정말 코스모스를 심었다. 꽃에게 물 햇볕 마음을 줬다. 큰아들 병준이도 언젠가 이 꽃처럼 활짝 웃어줄 거라고 믿었다. 병준이는 고2에 올라가자마자 자퇴를 했다. 사춘기에 부모가 이혼하고 형편도 어려워져 비뚤어진 것 같아 미안할 뿐이었다. 밤에는 컴퓨터 게임을 하고 낮에는 잠을 자며 청춘을 보내는 병준이를 연숙 씨는 3년간 기다렸다.
연숙 씨는 시를 정식으로 배우지 못했다. 2005년 동남보건대의 평생교육원에서 문예창작 수업을 들은 게 전부다. 인생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이던 자신을 위한 투자였지만 그마저도 6개월에 25만 원 하는 수강료를 낼 여유가 없어 3년 중 3분의 1을 못 다녔다. 2006년에는 금반지 하나를 전당포에 맡기고 20만 원을 변통하기도 했다. 일주일에 딱 하루, 금요일 오전에 하는 수업인데도 식당 일로 빠지는 날이 많았고, 수업이 끝나면 부랴부랴 식당에 나가느라 바빴다.
○ 꿈의 부활
시는 그저 느낀 대로 마음 가는 대로 쓰는 게 최고라고 여기는 연숙 씨다. 이제는 욕심을 조금 내보려 한다. 대학수학능력시험을 치러 국어국문학과에 진학하기로 했다.
형편이 나아진 것은 아니다. 다만 약간의 여유를 부려도 될 만한 기회가 왔다. 내년 8월 연숙 씨 인생에서 첫 휴가가 생긴다. 병준이는 지난해 3년짜리 유급지원병으로 입대했고, 지난해 성균관대에 입학한 작은 아들(창배)은 내년에 입대한다.
지난해 병준이가 입대한 뒤 연숙 씨는 ‘꿈 리스트’를 펼쳐봤다. 언젠가 이런 날이 올 것이라 생각하며 적어둔 것이었다. 제일 먼저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졸업해야 했다. 얼마나 오랜 꿈이던가. 연숙 씨는 올해 4월과 8월에 두 번의 검정고시에 합격했다. 4개월이면 할 수 있을 길을 연숙 씨는 40년을 돌아왔다.
내년엔 완벽한 혼자다. 아들들이 없으니 조금 덜 먹고 덜 쓰면 될 것이다. 일은 줄이기로 마음먹었다. 그 대신 수능 공부를 할 것이다. 이제 연숙 씨는 자기 인생을 찾으려 한다. 다 큰 자식들 인생에 개입하지도 않을 거고, 너희들 키우는 데 몸이 다 삭았노라고 기대며 주저앉지도 않을 것이다. 연숙 씨의 꿈은 몽골 인도 우즈베키스탄 등에 나가 한국어 교사를 하는 것. 가난과 자식 뒷바라지 때문에 포기해야 했던 배움의 기회를 남에게 나눠주고 싶어서다. 그 경험들을 글로 남기려 한다.
연숙 씨는 이런 포부를 적은 글로 지난해 보건복지부에서 주최한 ‘액티브 시니어 공모전’에서 장려상을 받기도 했다. 그가 써냈던 자서전 제목은 ‘꿈의 부활’이었다. 하고 싶은 일을 가슴에서 내려놓지 않으면 언젠가는 이룰 수 있는 법이다. 연숙 씨가 날갯짓을 한다. 본디 가진 게 없으니 날개가 아주 가볍다. 부활을 위한 비상(飛上)이 시작됐다.
수원=최예나 기자 yena@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