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민’ 가슴에 품고, 조선의 르네상스 꿈꾸다
다산 정약용 삶의 현장(맨위부터 시계 방향) 수원 화성 창룡문 , 남양주 여유당 현판, 남양주 다산 생가, 강진 다산초당 차부뚜막, 강진 다산 초당
“다산은 조선사회가 절박하게 요구하는 변혁의 방법과 방향을 제시한 인물이다.… 그의 학문은 출발부터 권위에 순응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세계를 향한 탐험이었다.… 다산의 평생에는 두 가지 중요한 계기가 있었다. 하나는 22세 때인 1784년 이벽을 만나 천주교신앙과 서양과학에 빠져들면서 성리학적 세계관의 벽을 깨뜨리고 아득하게 넓고 눈부시게 새로운 세계를 내다보게 된 점이다. 또 하나는 39세 때인 1801년부터 18년간 전남 강진에서 유배생활을 했던 사실이다.”
금 교수의 말대로 다산의 흔적은 깊고 아름답다. 우리 국토 곳곳에서 그 흔적을 만날 수 있다.
다산은 경기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에서 태어나고 그곳에서 세상을 떠났다. 남한강과 북한강이 만나는 두물머리(양수리) 인근이다.
다산은 자신의 집에 여유당(與猶堂)이라는 당호를 붙였다. 노자(老子)의 ‘도덕경’에 나오는 말로 ‘여(與)함이여, 겨울 냇물을 건너듯이, 유(猶)함이여, 너의 이웃을 두려워하듯이’라는 글귀에서 따온 것이다. 조심조심 세상을 살아가겠다는 의미다.
정조와 새 시대를 꿈꾸었으나 정조의 승하와 함께 다산은 시련의 세월을 감내해야 했다. 여유당이란 당호가 얼마나 의미심장한 것이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
○ 수원 화성, 다산과 정조의 꿈
다산은 1792년 화성을 설계했다. 기하학의 원리를 이용해 성의 높이나 거리 등을 측량함으로써 견고함과 아름다움을 모두 갖추도록 했다. 화성은 현재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다.
일꾼들이 힘겹게 돌을 지고 나르는 것을 목격한 다산은 2년 뒤 거중기를 만들었다. 많은 백성을 부역에 동원하고 싶지 않았던 다산과 정조의 꿈이 실현된 것이다.
이렇게 다산은 젊은 시절부터 탁월한 과학자였다. 천문 기상 의학 수학 기하학 농학지리 물리 화학 등 그의 관심사엔 한계가 없었다. 1789년 27세 때 설계한 한강 배다리는 배 60여 척을 강물에 띄우고 2000장이 넘는 널빤지를 깔아 만들었다. 배로 건너는 것보다 훨씬 빠르고 안전해 정조가 자신의 아버지 사도세자가 묻혀 있는 화성시 현륭원에 갈 때 이용했다. 이 모습은 화원들이 정조의 화성 행차 모습을 그린 ‘화성능행도’에 생생하게 표현되어 있다.
○ 포항에서 강진으로, 유배의 시절
○ 강진, 세상과의 진정한 만남
강진에서 처음 자리 잡은 집에 사의재(四宜齋)라는 당호를 붙이고 4년 동안 지냈다. 사의재란 ‘생각, 용모, 언어, 동작을 마땅히 바르게 하는 방’이라는 뜻.
마음을 다잡고 책 읽고 글 쓰는 일을 희망의 끈으로 삼았다. 큰아들 학연에게도 편지를 썼다. “폐족일수록 좋은 책을 많이 읽어야 한다. 머릿속에 책이 5000권 이상 들어 있어야 세상을 제대로 볼 수 있느니라.”
1808년 봄 만덕산 다산초당으로 옮겼다. 만덕산은 차나무가 많아 다산(茶山)으로 불렸다. 이 산이 좋아 자신의 호를 다산으로 정했다. 다산초당과 백련사를 오가며 혜장 스님, 초의 선사와 함께 차를 즐겼다. 다산이 오갔던 길, 다산초당에서 백련사에 이르는 산길엔 지금도 동백나무숲과 차밭이 있다.
다산은 초당에서 1818년 해배(解配)되기까지 10년을 보냈다. 1500권의 책을 쌓아놓고 치열하게 읽고 생각하고 부지런히 썼다. ‘목민심서’ ‘경세유표’ ‘아방강역고’ 등 그의 책 500여 권은 대부분 다산초당에서 태어났다. 제자 18명을 길렀고 이들과 초당에 정원을 꾸몄다.
다산초당에 가면 ‘다산동암(茶山東庵)’ 등 다산의 친필 현판을 만날 수 있다. 다산동암 건물엔 추사의 ‘보정산방(寶丁山房)’ 현판도 걸려 있다. ‘정약용을 보배롭게 여긴다’는 뜻으로 그에 대한 추사의 경외심을 느낄 수 있다.
이광표 기자 kplee@donga.com